출판사 리뷰
1장 봄날의 기억
“아침에 꽃이 피었네. 어제까지는 못 보았는데….”
라미는 화분에 물을 주며 혼잣말했다.
“인연이 아니었을까.”
꽃을 살펴보다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름을 떠올렸다. 말이 적었지만, 눈빛이 강렬했던 준호, 뚜렷한 얼굴선에 눈매는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정면을 응시할 땐 상대가 사뭇 긴장할 정도였다. 높은 콧대에 가늘고 선명한 입술은 평소에 굳게 다물고 있지만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 장난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출근길, 그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은 내가 먼저 인사할게요. 다음부터 먼저 인사하세요.”
“뭐라고요?”
그날 이후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이상하지. 내 마음도 꽃처럼 피어나는 느낌이야.”
손끝으로 꽃을 만지며 말했다.
“그 사람이 웃을 때 눈이 반쯤 감기던 모습이 생각나. 오늘은 그 사람도 나를 한 번쯤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다.”
봄바람이 머물던 시절 라미는 긴 생머리를 어깨에 찰랑이며 햇빛 아래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얼굴로 생기가 넘쳤다. 동그랗고 빛나는 눈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해서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눈빛이 달라졌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코에 코끝은 동글어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얼굴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단아했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엔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짙은 갈색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보는 이에게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날, 좋아했을까?”
라미는 자신에게 묻듯 중얼거리며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찻물이 끓자 뜨거운 김이 창가를 향해 피어오르다가 허공에 흩어졌다. 찻잔 하나와 여분의 찻잔을 꺼냈다.
그녀만의 작은 의식이랄까. 어느 오래된 찻집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처럼. 사람이 오지 않아도, 비가 내려도 오늘 하루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차 한 잔 나눌 이유는 충분하다고.
라미는 비가 오든, 마음이 흐리든 차를 준비했다. 아주 가끔 찻잔의 따스한 김 너머로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조용히 감사할 수 있는 기억이었다.
아침에 혼자 마시는 커피는 예전처럼 쓰지 않았다. 혼자가 익숙한 쓸쓸함마저 따뜻함으로 녹여내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소녀 같은 순수함이 살아있었다.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웨이브 져 있고 햇빛 아래에서는 은은한 갈색 빛이 감돌며 부드러운 인상을 더 했다. 웃을 때 양 볼에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라일락 향 스며들 듯 30년 전 일기를 꺼냈다. 상처와 아픔을 곱게 갈무리한 채 마음속엔 깊은 감정과 사랑이 젖어 들었다.
1990. 05. 25
준호와 함께 한 시간이 왜 그렇게 짧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세상은 멈추고 오직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내 마음이 그에게 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끝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1991. 08. 05
최근 들어 준호와의 사이가 어색해졌다. 그의 눈빛이 예전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나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마음이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이유가 나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1992. 12. 20
준호에게서 돌아서기로 결심했다. 그와 어긋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무 의식했다. 내가 그를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그도 나를 이해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상처만 준 것 같다.
1993. 01 20
그와 함께한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한순간의 꿈이었다. 나만의 꿈이었을까? 그를 잊기 위해 방황했지만, 빈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1993. 12. 08
그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면서 더 이상 서로의 삶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내 안에서 그를 잊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는 내게 어떤 존재였을까?
햇살이 거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펼쳐놓은 일기장을 덮었다. 라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식어버린 커피는 향을 잃었다. 봄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커튼을 흔들었다. 바람은 오래된 기억이 되어 과거로 이끌었다.
남편 민수와 헤어지고 혼자 살아가는 그녀에게 누군가는 외로울 거라 했지만 혼자인 것이 아니라 비워둔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일기장 속에 꽂아 두었던 낡은 사진 한 장을 손끝으로 훑었다. 사진 속 그는 변함없이 미소 지었다.
“그때가 아마 스물두 살이었지.”
그리움과 용서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커튼이 조용히 펄럭였다. 햇살이 30년 전 짙은 주홍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커튼은 여전히 살랑거렸다. 마치 끝나지 않은 그리움과 용서의 이야기처럼.
세 명의 신입 사원 입사 서류를 복사하는 날 아침, 햇살이 창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라미는 사무실 복사기 앞에 섰다.
복사된 서류가 나오며 한 부씩 차례로 출력을 확인했는데 그중 한 명의 서류가 두 부씩 나와서 급하게 정지버튼을 눌러보았지만 그대로 미끄러져 나왔다. 여분의 입사 서류를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점심시간, 파란 하늘 아래 직원들이 배구 경기하는 수다스러운 소리 속에서도 고요함을 느꼈다. 손에 쥔 서류 한 장이 신경 쓰여 무심히 가방에 접어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이 보랏빛 노을로 곱게 물들었다. 라미는 복사해 온 서류를 꺼냈다. 인쇄된 남자의 사진 속에서 눈빛이 반짝였다. 눈썹 한 올, 눈꺼풀의 그늘까지 선명했다.
자기소개와 이력서를 읽으며 남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분이랄까. 별생각 없이 가져온 종이 한 장이 은은한 떨림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다음 날 아침 출근 후 회의실 청소를 끝내고 옥상으로 나간 라미는 정문을 지나서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바람과 햇살에 그녀 눈동자가 반짝였다.
준호는 사무실 문밖을 지나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눈빛은 말갛고 어딘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머릿결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하얀 블라우스가 햇빛을 받아 눈부신 라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돌아섰다.
고요 속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사람. ‘이 느낌은 뭐지?’ 준호는 아무런 말이 오고 가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쥐고 흔드는 라미가 계속 생각났다. 라미가 사는 동네로 이사할 예정이었다.
이사 온 첫날 동네 풍경을 천천히 걸어가며 살펴봤다. 한적한 골목길 사이로 햇볕은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이전에 여러 도시에서 자취했지만, 이곳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새로 이사한 원룸은 작고 아늑했다. 상자가 방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책상과 의자만이 놓인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무엇부터 시작할까?”
짐을 풀고 정리하고 나서 빈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집 앞을 걸어가는 라미와 마주쳤다.
“준호씨, 여기로 이사 왔나요?”
라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 여긴 어쩐 일로.”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이사 온 첫날 라미와 마주쳤을 때 그녀와 특별한 인연임을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아침 출근길 라미는 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를 의식했다.
“안녕하세요.”
준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라미는 사무실 앞 벤치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준호를 보았다. 그는 책에 깊게 몰두한 듯 보였지만 라미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책 재미있어요?”
“네, 좋아하는 책 있어요?”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는 쓰는 걸 좋아해요. 일기 같은 거.”
“일기?”
“그날 들었던 느낌을 써요. 쓰고 나면 마음이 정리돼서요.”
“멋지네요.”
“마음 정리하는 거죠.”
“나도 써야겠어요.”
주고받는 말은 같은 취미를 공유하게 된 설렘으로 이어졌다. 라미는 문득문득 입사 서류 속 준호의 글씨를 떠올리며 운명처럼 다가온 인연에 두근거렸다. 한 장의 서류가 가져다준 특별한 시작은 복사기를 통해 전해진 작은 인연 조각 하나였을까.
‘오늘은 그가 책을 읽고 있었어.’ 라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슴 속에 감정의 물결이 일렁였다.
준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출근을 위해 같은 장소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라미가 멀리서 뛰어오는 준호에게 소리쳤다.
“빨리 오세요.”
준호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버스 놓칠 뻔했어요.”
“고마워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준호씨 좋아해?”
직장 동료 지은이 물었다.
“아니.”
라미는 놀라며 대답했다. 지은의 표정은 야릇했다.
“그럼, 헛소문?”
“같은 동네 사는 직원일 뿐이야.”
준호와의 관계가 점점 더 특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라미도 받아들였다. 준호와 함께 퇴근할 때 라미 동창 민수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 사람하고 자주 만나는 것 같아.”
“같은 동네 살아.”
얼굴이 붉어지며 라미가 대답했다. 민수 얼굴에 야릇함이 묻어나왔다.
“둘이 친해 보여.”
준호도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라미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뿐인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걱정되네요.”
라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라미는 친구가 엄마에 관해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도, 진실도.
집에선 향냄새가 났다. 엄마 방 창문 틈으로 마른 고사리 타는 연기가 섞여 들어왔다. 엄마는 종이를 불에 태우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읽을 줄 모르는 경전 속 ‘신의 말씀’이었다. 언젠가 큰 비닐 포대에 자기 교복을 구겨 넣고 어딘가에 숨겼었다.
“우리 딸은 장한 기운이 있어.”
천신 명신을 숭배하는 엄마가 부끄러워 열일곱의 봄 족쇄처럼 옥죄었다. 라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불안하고 좋지 않은 기운이 50대 후반 현재로 돌아오게 했다.
“그때, 그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었지. 따뜻한 손등, 그 순간의 평온함. 모든 것이 나를 숨 쉬게 했었지.”
탁자 위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커피가 입술에 닿자, 커피포트를 다시 작동시키며 뒷목을 살짝 매만졌다.
“이제 멈추지 말자.”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김이 피어오르듯 추억을 떠올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허여경
계간 『스토리문학』 등단, 장편 소설 『진영아 괜찮아』, 단편 소설집 『오후 4시의 여자』. 동인·문예지 발표작 : 「진주의 사랑」 外 다수, 서일대학 사회교육원 한글 강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