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가난과 죽음, 사회적 낙인으로 얼룩진 가족사가 세대 간의 이해와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황혜란의 서사는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개념을 통해 조망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갱생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탄생이라는 사건은 작중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새 생명의 출산은 물론이고, 절망 속에서 맞이한 운명의 전환이나 오랜 침묵 끝에 찾아온 이해와 화해의 순간들도 일종의 새로운 탄생이다.
출판사 리뷰
작가는 오랜 망설임 끝에 과거의 기억을 써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우리 가족 이야기는 대단할 것 없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 보통 그 언저리 어디쯤의 이야기”지만, 흐릿한 기억의 베일을 걷어내고 함께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날들을 정직하게 복원해 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진술한다. 과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겠다는 작가의 행위는 일종의 저항이며 반란이다. 즉 침묵을 깨고 이야기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세계를 새로 열어버리는 의지의 발현이다. 진실한 자기 서사는 자기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주체적인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가난하고 험난했던 부모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것으로 타자인 부모의 삶을 객관화하면서 “둘이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 네 남매를 그럭저럭 키워낸 것,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뭘까”라고 반문한다. 정말로 가진 것 없이 시작했지만, 네 아이를 길러낸 성취는 평범한 부모의 역할을 넘어서 하나의 위대한 시작이다. 부모는 주어진 궁핍과 불운에 순응만 하지 않고 행동을 통해 새 현실을 창조해 낸 주체들이다.
그러나 이 가족은 또 한 번의 격변에 처해진다. 가정을 지탱하던 어머니가 돌연 무당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첫아들을 상실한 오래 묵은 상처와 가난한 살림을 일으키느라 누적된 고난의 무게로 남몰래 힘겨웠던 어머니는 결국 신내림을 받아 무당(샤먼)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평범한 식당 주인이자 아내, 엄마였던 여성이 하루아침에 영적인 세계의 중개자가 된 이 극적 변신은, 한편으로는 운명에 순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를 새로이 정의하는 용기 있는 행동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가족의 입장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녀였던 작가 본인은 스물셋의 나이에 갑자기 닥친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이 원통했고 부끄럽고” 무엇보다 너무 바빠서 어린 동생들 마음을 챙길 겨를조차 없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신내림을 받으러 집을 떠난 사이, 맏딸인 그는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어린 세 동생을 돌보는 부담을 홀로 짊어졌다. 어머니의 무당 되기는 어머니 자신으로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유의 실행이었지만, 그 행동의 파장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가족들에게 미쳤다. 가족들에게 의도치 않은 고통과 책임을 안긴 셈인데 그중 가장 큰 피해자가 큰딸이다. 황혜란은 당시 심정을 숨김없이 밝힌다. 그는 한때 “사과를 받는다면 응당 내가 받아야 한다고” 여겼을 정도로 어머니를 원망했고, 무당의 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느꼈다. 심지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엄마가 무당”이고 집안이 망했다고 일부러 털어놓아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식으로 배척과 자기 보호의 무기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딸은 어머니의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분노와 수치심에 갇혀 있었다.
가난과 죽음, 사회적 낙인으로 얼룩진 가족사가 세대 간의 이해와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황혜란의 서사는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개념을 통해 조망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갱생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탄생이라는 사건은 작중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새 생명의 출산은 물론이고, 절망 속에서 맞이한 운명의 전환이나 오랜 침묵 끝에 찾아온 이해와 화해의 순간들도 일종의 새로운 탄생이다. 첫아들을 잃고서도 다시 아이들을 낳아 가족을 일군 부모, 중년에 무당이 되어 자기 운명을 다시 쓴 어머니, 그리고 뒤늦게 부모의 삶을 이해하며 용서를 실천한 딸. 이 모두가 탄생성의 드라마를 펼치는 주인공들이다. 자유는 이들 각자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구현된다. 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볼 자유를 얻었고, 딸은 글쓰기로 과거를 공개하는 것으로 편견을 깨는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으며, 나아가 용서의 자유를 발휘해 스스로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무엇보다 이들의 이야기는 세계 속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부모는 자식을 책임졌고, 자식은 부모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그 책임을 함께 짊어졌다. 어머니는 무당이라는 특수한 역할을 통해 가족과 주변인의 영혼까지 돌보는 책임을 자임했다. 이러한 모습은 아렌트가 강조한, 새롭게 태어난 존재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 인간 사회의 본질적 과제라는 통찰과 상통한다.
결국 황혜란의 가족사는 탄생과 죽음의 굴레 속에서도 이어지는 인간 행동의 이야기다. 한 생명의 탄생이 때로는 비극을 불러왔지만, 또 다른 행동과 사랑으로 그 비극을 이겨내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아렌트는 인간 세상이 ‘기적’ 없이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기적이란 다름 아닌 탄생성, 즉 새로운 시작을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능력이다. 황혜란의 어머니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황혜란 본인이 그 어려운 기억을 글로 풀어 우리 앞에 내놓은 일 자체가 작은 기적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탄생성의 빛으로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세계도 인간의 행동을 통해 변화되고 갱신될 수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들은 결코 개인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서로 얽힌 삶 속에서 함께 책임지며 만들어가는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황혜란의 서사는 고통과 한계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인간 정신에 대한 찬사이며, 아렌트의 철학이 말해주는 인간다움의 존엄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황혜란
1977년 12월 경기도 이천 출생2001년 충북대학교 국제경영학과 졸업2001년부터 2016년 무역회사 근무2011년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둠2022년 브런치 작가로 활동 시작2022년 제2회 서울시교육청 학습성장스토리 공모전 우수사례 선정-『똑똑, 마음이 자라는 소리』2022년 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수필 「슈퍼가게 아가씨」로 등단2023년 아르코 문학나눔 독후감 공모전 장려상 수상2024년 격월간 『에세이스트』 114호에 문제작가 신작특집2024년 12월 <데일리 한국>에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진혼굿」 게재2025년 『에세이스트』 올해의작품상 수상-「무당의 딸이라 미안합니다」오래 문학을 꿈꾸며 백여 편의 시와 몇 편의 소설을 썼지만 아직 습작이다.
목차
책 머리에…4
제1부
문학이 다가와 하는 말들…10
은빛 자락…14
조연시대…18
3XL…22
인간 온난화…26
시가 먹는 것인가요?…31
철학을 먹고 사는 사람들…35
얼쑤 절쑤…39
튼 사이…45
불씨…50
제2부
흐린 기억 속의 반란…56
남과 여…63
안녕, 나의 세모집…69
슈퍼가게 아가씨…75
천호동 구옥의 힘…82
너무 가깝고도 먼…90
보통 그 언저리 어디쯤(1)…96
보통 그 언저리 어디쯤(2)…102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1)…107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2)…114
제3부
첫아이를 잃어 버린 그녀…120
무당이 되기까지…126
신의 줄기, 대물림…134
무당의 아이들…140
진혼굿…147
그녀의 오지랖…154
죽음의 그림자…162
도깨비 방망이, 간판도 없는 무당집…169
제4부
만취의 계절…180
다시, 만취의 계절…184
헛된 꿈은 없다…191
육아가 뭐길래…196
잠과의 전쟁…200
방패…207
사주 풀이를 권합니다…211
…라면…216
제5부
막걸리 두 병…222
달리지 않는 여자…226
불안과 감각에 대하여…229
엄마 뚝…234
어찌합니까…238
만병통치약…244
아저씨와 아줌마…249
세 개의 눈…255
황혜란 론
김지예 신데렐라의 환상을 깨부수는 ‘꿈꾸는 여자 사람’…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