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난해한 보르헤스 단편에 접근하는
가장 쉬우면서도 논리적인 저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작품이 재밌기를 바란다는 견해를 여러 번 내비친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재미를 찾으려면 일단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보르헤스의 난해한 작품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 기여하며, 그의 농담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드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1. 이 책을 발행하며: 지금껏 본 적 없는 보르헤스 읽기
신우승의 <보르헤스와 열한 개의 우물>이 도서출판 b에서 출간되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스페인어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수많은 철학자와 이론가, 작가들의 극찬과 인용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르헤스의 가장 유명한 단편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곱씹고 사유하는 ‘저서’는, 대중들이 접근하기 힘든 학술서 한두 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보르헤스는 한국에서 그저 받아들이고 인용하고 상찬하는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대중과는 유리된 채 아카데미 안에서만 떠받들어지고 있는 작가는 아닐까?
신우승의 <보르헤스와 열한 개의 우물>은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그리고 이를 해결하고자, 쓰인 책이다. 철학 연구자이자 번역자이자 ‘전기가오리’ 출판사 운영자인 그는 보르헤스의 단편들에 담긴 ‘농담들’에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이 지닌 겉보기의 난해함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보르헤스 소설에 담긴 의미와 속뜻을 대중과 함께 나누며 이를 풀어 해설해 주는 전문가들의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 신우승 자신이 이 책을 통해 그 일을 시도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작품이 재밌기를 바란다는 견해를 여러 번 내비친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재미를 찾으려면 일단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보르헤스의 난해한 작품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 기여하며, 그의 농담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드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은 총 11편의 보르헤스 단편들을 다룬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 <기억의 천재 푸네스> 등,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독자들은 신우승이 다루는 보르헤스 단편을 구해 먼저 읽은 후 신우승의 글을 이어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각 장을 ‘독법’, ‘확장’, ‘심화 질문’으로 나눈다. ‘독법’은 각 단편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 해설, 독해, 시선을 담았다. 독자들은 ‘독법’ 부분을 읽으면서 자신이 읽었던 보르헤스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독법’을 통해 몇 개의 논제를 제시한다. 이는 보르헤스 단편을 단지 문학 내적인 방식의 탐미주의적 읽기로 치환하지 않고,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읽기로 만들려는 그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확장’에서는 ‘독법’에서 제시된 논제를 가지고 독자들의 실생활에 확장시켜 적용해볼 수 있는 예제들이 등장한다. ‘심화 질문’에서는 앞으로 더 사유해 볼 질문들을 담았다. 이런 식의 구성은 관습적인 문학비평의 구성이 아니며, 전통적인 철학서의 구성 역시 아니다. 저자는 어떤 작품을 작품 내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하는 문학비평의 방식보다는 “작품을 통해 세계를 새로이 읽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보르헤스의 단편과 21세기 한국에 사는 독자의 세상을 연결하려고 한다. 보르헤스에서 길어낸 논제와 사유를 2025년 한국의 문제들로, 나의 문제들로 잇고 확장하려고 한다. 저자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 판단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자문해 보길 바란다. 도대체 나는 이런 식의 문학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도서출판 b의 새로운 시리즈: b-SIDE
이 책을 첫 책으로 하여, 도서출판 b는 새로운 문고판 시리즈를 내놓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나이가 아니라) 생각이 젊은 작가(비평가, 연구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등 누구나)가 자신이 천착하고 관심을 가진 주제를 많이 길지 않은 호흡으로 펼쳐놓는 저서 시리즈다. 그동안 한국의 인문학 저서 시장은 대학교수들이 중심이 된 ‘학술’ 분야가 한 편, 대중적 지식 커뮤니케이션이 중심이 된 ‘대중 교양’ 분야가 한 편을 이뤄왔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리즈는 ‘학술’이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논문 형식을 피한, ‘대중 교양’이면서도 학문적 바탕이 탄탄하고, 도발적이면서 혁신적인 저서를 지향한다. 누구나에게 쉽게 말을 걸고 있지만, 그 내용은 소화 잘되는 ‘쉬운 인문학’이 아닌, 지금껏 흔히 본 적 없는 주장을 담은, 작가의 인장이 박힌, 주류 학계에서 출판되기 쉽지 않을 수 있는, 하지만 글의 깊이는 수준급인, 그런 글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시리즈의 저자들은 대학과 텔레비전과 유튜브에서 ‘잘 나가는’ 명사들은 아닐 수 있지만,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작가들이다. 이 책에 이어서 김홍식의 <초월신경증>, 나익주의 <세상은 은유다>가 발간 예정이다.
고심해서 지은 이 시리즈의 이름은 ‘b-SIDE’이다. ‘b-SIDE’는 레코드나 테이프의 뒷면이다. 주력하는 히트곡은 주로 A-SIDE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b-SIDE에 담긴, 알려지지 않은 명곡, 모두가 흥얼거리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는 주옥같은 노래에 주목하고 싶다. b-SIDE는 영어 단어 ‘beside’의 발음과도 같다. ‘beside’는 ‘옆으로 비켜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중심보다는 주변, 주류보다는 비주류, 메인스트림보다는 언더독의 목소리와 시선과 사유를 담고 싶은 이 시리즈와도 통한다. 그래서 다시, 이 ‘b-SIDE’ 시리즈는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형식, 자신의 내용을 맘껏 발산하고 싶은 모든 작가들에게 열려 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만을 소리 내어 읽음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큰 소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을 뜻하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독자가 작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한다. 독자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임의적 개입이나 주관적 판단 없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예컨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진건의 의도라고 할 때,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는 가정 폭력범인데? 죽은 아내의 따귀를 때려?’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 반응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따라서 작품을 잘못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의 ‘독법 1’ 중)
- “삼인칭이었던 소설의 화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보르헤스로 바뀐다. 보르헤스는 자신도 아베로에스와 다를 바 없다고 고백한다. 아베로에스라는 이슬람 철학자는 그리스를 모르면서도 그리스 철학 문헌을 번역하고자 했고, 보르헤스라는 아르헨티나 소설가는 이슬람도 모르고 다른 시대에 속하면서도 아베로에스를 이해하고자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탐색한다. 설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하나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자 하는 이러한 모색이 바로 ‘아베로에스의 모색’이고, 이 이 모색이야말로 시의 본질, 은유의 본질, 번역의 본질이다.
이 모색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오역을 보고 아베로에스가 처한 상황을 떠올려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자신이 말하듯, 보르헤스가 아베로에스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이 작품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느낌”(130쪽)을 받으면서도, “짧은 글 몇 개 이외의 다른 자료”(130쪽)만으로 어떻게든 아베로에스를 그리려 했던 보르헤스의 시도에는 분명히 가치가 있으며, 이 시도 자체가 오늘날 아베로에스를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게 한다. 다른 세계에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 은유와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그 세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오역은 비웃음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야말로 아베로에스의 오역이 있었기에 쓰일 수 있었다.”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독법 2’ 중)
-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복수할 수도 있고, 공적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엠마 순스」의 엠마 순스와 <존 윅>(2014)의 존 윅은 전자를 택하며, <장화홍련전>의 장화와 홍련은 후자를 택한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지인가?
예)
내가 보기에는 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사적 복수에는 공적 처벌에 수반되는 객관적 진상 규명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엠마와 존/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때문이다.”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의 ‘확장’ 중)
- “소설가의 존재는 소설의 존재에 의존하고, 소설의 존재는 소설가의 존재에 의존한다. 앨리스의 존재는 붉은 왕의 존재에 의존하고, 붉은 왕의 존재는 앨리스의 존재에 의존한다. 「원형의 폐허들」은 존재자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상호 관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듯 상호 관입하는 항에 부정적인 것을 넣어보자. 예컨대 사기 행위의 존재는 사기꾼의 존재에 의존하고, 사기꾼의 존재는 사기 행위의 존재에 의존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순환 내지 상호 관입은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긍정적인 것들 간의 상호 관입은 허용하면서 부정적인 것들 간의 상호 관입은 허용하지 않을 방책이 있는가?” (열한 번째 우물, ‘불에 타지 않는 꿈’의 ‘심화 질문’ 중)
작가 소개
지은이 : 신우승
‘전기가오리’(www.philo-electro-ray.org)의 운영자이다. ‘전기가오리’는 사회정치적인 주제의 철학적 측면에 주목하고, 반엘리트주의를 주창하며, 철학을 둘러싼 격차 문제의 해소에 기여하고자 하는 학문 공동체, 공부 모임이자 출판사이다. <보르헤스와 열한 개의 우물>은 ‘전기가오리’에 연재되었던 글을 전면수정한 것으로, 이러한 ‘전기가오리’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이다. 쓴 책으로는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공저), 옮긴 책으로는 <헤겔의 영혼론> 등이 있다. <있는 것에 관하여>(공역)를 포함한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 및 서양 철학의 논문도 여럿 번역했다.
목차
ㅣ들어가며ㅣ _ 9
첫 번째 우물 말이 통하는 것은 힘들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_ 13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_ 29
세 번째 우물 책을 읽듯 세계를 읽으려고 했으나
바벨의 도서관 _ 47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아베로에스의 모색 _ 65
다섯 번째 우물 가능성이 우글대는 미로 속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이 있는 정원 _ 83
여섯 번째 우물 불확실성을 떠안기
바빌로니아의 복권 _ 101
일곱 번째 우물 기억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기억의 천재 푸네스 _ 119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엠마 순스 _ 137
아홉 번째 우물 타자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있는 타자
알모타심에게 다가가기 _ 155
열 번째 우물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그리고 희망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_ 171
열한 번째 우물 불에 타지 않는 꿈
원형의 폐허들 _ 195
ㅣ나가며ㅣ _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