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미 단편 소설집 『불면 클리닉』과 장편 소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매우 불편한 관계』 2권을 출간한 황혜련 작가가 《실천문학》에서 세 번째 장편 소설 『잘 가요 아버지』를 출간했다. 1부 아버지의 집, 2부 아버지의 여자, 3부 잘 가요 아버지, 3부로 구성된 이 장편 소설은 2남 2녀의 막내딸인 화자가 은퇴한 후 치매가 온 아버지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떻게 아버지와 잘 이별할 것인가를 아버지의 삶을 씨줄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날줄로 삼아 담담히 직조해내고 있다.‘아버지의 자식으로 살 때는 아버지 등에 빨대를 꽂아 받는 수혜가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으나 정작 아버지가 자식의 보호를 받아야 할 때는 당연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 소설은 그런 불공정한 거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작가의 말에서 보듯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면서 다른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치매 간병 소설과 달리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 주는 한 편의 반성문이다.‘누구나 피해 가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치매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과연 부모가 처한 치매라는 유령의 시간 앞에서 얼마만큼 담담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며 가족 간 서로 상처 입은 삶을 다독이고 아버지와 잘 이별할 수 있도록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가족 소설이다’는 이순원 작가의 추천사처럼 이 소설은 가족의 치매라는 유령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가족의 치매라는 유령과 작별을 준비해야 하는가? 묻고 답하고 있는 소설이며, 살아 있는 이별을 묵묵히 견뎌내는 자들을 위한 문학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또 집에 가자고 졸랐다. 이젠 여기가 아버지 집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때 이른 스프링코트와 전엔 늙어 보인다며 잘 쓰지도 않던 중절모까지 어디서 찾아 쓰고는 방문 앞에 버티고 서서 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이쯤 되면 말릴 방도가 없다. 나는 두툼한 패딩 조끼를 꺼내 입고 아버지를 앞세웠다. 아버지는 어느새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다. 나와 아버지가 나서는 걸 주방에서 저녁밥을 짓던 엄마와 큰올케가 빤히 쳐다본다. 이젠 참견하기도 지겨운지 나와 보지도 않는다. 엄마의 끌끌 혀 차는 소리만 주방을 뚫고 간간히 새어 나왔다. 현관을 나서면서 아버지의 스프링코트가 너무 얇다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그러다 말았다. 정신 나간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히려면 그것도 일이었다. -1부 ‘아버지의 집’에서
여자는 흰 티셔츠에 검정 가디건을 걸치고 출구 쪽을 향해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배낭은 한쪽 어깨에만 걸쳤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 여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그냥 서로를 알아봤다. 여자가 나를 향해 웃었다. 고른 치아가 형광 불빛 아래서 빛났다. 내가 가까이 가자 여자도 한 발 다가왔다. “저기…”내가 먼저 입을 뗐다.“어서 와요.”여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조금 전까지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를 고민하던 건 기우였다. 여자의 미소를 보자 금방 편안해졌다. 여자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보통 체격의 전형적인 몽골 여자 상이었다. 못생긴 건 아니었으나 딱히 예쁘지도 않았다. 얼굴을 살포시 덮고 있는 주름을 걷어낸다 해도 그저 평범한 얼굴일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이 여자를 왜 좋아했을까.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의문은 풀리겠지만 나는 여자가 평범해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누가 보더라도 매력적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건 아주 흔한 일일 테니까. -2부 ‘아버지의 여자’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황혜련
강원도 강릉에서 나고 자랐다. 숙명여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나와 방송 일을 잠깐 했으나 조직 생활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소설을 썼다. 201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깊은 숨」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염소」가 천만 원 고료 진주가을문예에 당선되었으며, 장편 소설 「촌」으로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을 수상했고, 경기문화재단과 강원문화재단에서 창작 지원금을 수혜했다. 소설집 『불면 클리닉』과 장편 소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매우 불편한 관계』가 있다. 지금은 낙향하여 95세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