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서구 근대의 위대한 출발점으로 찬미하며 ‘계몽주의’를 떠올리자마자,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그리고 백과전서파의 디드로 같은 ‘서구’의 백인 남성 사상가들이 저절로 연상될 것이다. 계몽주의를, 과학적 인종주의와 근대적 제국주의, 집단학살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는 급진적 사상가마저 이러한 서구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이 책 『해적 계몽주의』의 저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계몽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간 이어져 온 논쟁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계몽주의 이상들, 특히 인간 해방에 대한 계몽주의 이상들이 과연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구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우리는 ‘백인’의 완곡한 표현에 불과한 ‘서구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인종적 오만함에 대한 비난을 구실로 ‘백인’으로 분류되지 않은 모든 이들이 역사, 특히 지적인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배제해왔다. 그 대신 역사, 특히 급진적 역사가 일종의 도덕 게임이 되어버렸는데,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위인들이 저질렀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배외주의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루소를 비판하는 사백 쪽의 책이 여전히 루소에 관한 사백 쪽의 책이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루소를 비판하는 그 행위 자체도 여전히 루소라는 서구의 백인 지식인만을 부각시킬 뿐, 비서구의 지적 영향과 성취를 배제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왜 우리는 아메리카 선주민인 칸디아롱크 같은 인물을 인간 자유에 대한 중요한 이론가로 간주하지 않는가?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이론가였다. 왜 우리는 해적과 말라가시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톰 치밀라호 같은 인물을 민주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하지 않는가? 휴런족과 베치미사라카 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 여성들, 대부분은 그 이름조차 사라져버린 여성들의 기여는 왜 우리가 그런 남성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배제되어왔는가? [계몽주의의 산실이었던] 살롱을 조직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계몽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광범위하게 배제된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가 ‘해적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40년 내지 50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전 일이다. 그런데도 전 세계 사람들은 여전히 해적들과 해적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거기에 늘 함께했던 주술, 섹스, 죽음 등에 관한 일종의 만화경적 판타지들로 공들여 꾸민다. 이런 이야기들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 자유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구현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 비전은 18세기 내내 유럽의 살롱에서 채택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인 자유의 비전들과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해적들이 그들의 동포들보다 몇 가지 실질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첫째, 그들은 현지 동맹국들을 대접할, 종종 상당한 양의 동양 사치품들에 실제로 접근할 수 있었다. 둘째, 고국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완전히 거부한 그들로서는 말라가시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인 관찰자들은 생트마리 항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도 재료에 금은으로 수를 놓은 드레스를 입고, 금목걸이와 팔찌, 심지어 상당한 가치의 다이아몬드까지 착용한” 말라가시 여성들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볼드리지 자신도 현지에서 결혼했고 여러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해적들이 정착하여 정말로 말라가시인이 된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부의 외부자(internal outsiders)’라고 불리는 혼혈 말라가시 외국인의 전통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들은 외국 상인들과 내부인을 중재할 수 있었으며 그곳의 해안 지역에 익숙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데이비드 그레이버
인류학자. 1961년 뉴욕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뉴욕주립대학교를 졸업. 마다가스카르에서의 현장 연구로 시카고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까지 예일대학교에서 가르쳤으나, 그의 대담한 사회 비판과 실천적 행동에 반감을 품은 학교 측으로부터 해고당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월가를 점령하라’를 비롯한 세계정의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고고학과 인류학을 도구 삼아 자본주의와 국가 너머의 삶을 상상하고 새로운 삶과 관계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2020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으로써《해적 계몽주의》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