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문화서이지만, 지금까지 『삼국유사』 번역서는 대부분 원문의 충실한 번역과 여기에 어려운 용어에 관한 간단한 설명 정도에 그친 형태였고, 일부 번역의 오류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그에 비하여 이 책에서는 『삼국유사』의 원문과 번역 외에,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 사실에 비중을 둔 해설을 통해 『삼국유사』를 이해, 감상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해설은 그간 이뤄진 학계의 연구를 분석하여 그 성과를 포괄적으로 담았기에 이 자체로써 하나의 『삼국유사』 해설서로 읽힐 수도 있을 만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2024년 간행한 『삼국유사 흥법탑상』편을 통해 우리 불교사와 불교미술에서 가장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정리해 들려준 신대현 교수는 이번에는 고대사와 신화의 경계에서 우리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삼국유사 기이1』편을 출간하면서 “「기이(紀異) 1」편은 『삼국유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우리들은 단군을 비롯해 박혁거세, 온조, 김알지 등 고대 국가의 시조들과 신화적 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이 책은 『삼국유사』 5권 9편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작점인 「기이 1」의 원문과 해설을 함께 담아, 독자들에게 우리 고대사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삼국유사』는 총 144개의 항목을 9편목에 나누어 구성한 책이다.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편목은 바로 「기이」이다. 이 책은 특히 그중 「기이 1」편에 집중하여 구성되어 있다. 신화와 설화, 역사와 민속이 뒤섞인 이야기들은 단순히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전해지는’ 이야기, 곧 정사에서 다루지 못한 고대사의 다양한 기억을 담고 있다.웅장한 고구려 건국의 서사가 시작되는 글이다. 제목은 <북부여>이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이로써 고구려 건국의 서막을 알리겠다는 의도로 수렴되는 듯하다. 천제(天帝) 해모수가 하늘에서 흘승골성에 내려옴으로써 고구려 역사가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해모수는 천제가 아닌 천제의 아들[帝子]이고, 사람들이 그를 ‘천왕랑(天王郎)’이라 불렀다고 하여 조금 다른 대목도 있으나 전체 맥락은 같다. 학계에서는 이 북부여를 ‘부여의 북쪽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나라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예는 남대방·북대방 등이 있다.-「북부여」에서
일연은 『주림전』에 나오는 영품리왕과 시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영품리의 다른 이름이 해부루이며 시녀가 낳은 아들이 곧 동명성왕이라고 하였다. 이 두 설화를 비교해 보면 어머니의 신분이나 주인공의 이름 등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비하게 태어나 어머니가 홀로 키웠고, 걸출한 외모와 탁월한 능력 때문에 권력자의 시샘을 얻어 핍박받아 큰 곤경에 처했으나, 결국 이를 이겨내고 나라를 세웠다는 줄거리가 거의 비슷하다. 고대 영웅의 건국 설화라는 모티프 면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연은 동명성왕 설화를 『삼국사기』 위주로 설명하면서도, 이의 근거가 훨씬 전에 쓰인 『주림전』의 영품리왕 설화라고 보아 문장 맨 뒤에 이를 소개하였다. -「고구려」에서
일연은 대체로 『삼국사기』 「본기」 등에 나오는 글을 요약 정리하고, 그 중간 군데군데 자기 생각을 덧붙임으로써 전체 맥락이 잘 이어지도록 하였다.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경주에 촌장이 다스리는 여섯 촌락이 각각 자리하였다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해 커다란 하나가 되었다. 이런 서사는 부족 국가에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촌장들이 촌락을 대표함은 물론이고 훗날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어렴풋이나마 신라 사람들의 뿌리도 범상치 않았다고 말하고자 한 듯하다. 촌장들도 하늘에서 내려온 비범한 인물이었던데다가, 이들의 왕이 된 혁거세와 알영은 알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신비한 존재 그 자체였으므로, 이들의 후손인 신라 사람들의 자존감 역시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 또는 황금 상자에서 태어난 인물을 시조로 함은 고대 건국 설화의 전형이다. 『삼국사기』에도 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이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이야기가 허황하다고 말하기도 하겠으나, 신성(神性)이 대중과 접속한 상황이 은유적 묘사였다고도 볼 수 있다.-「신라의 시조 혁거세 왕」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일연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전씨,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 호는 무극·목암이다. 경주 장산군(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이다. 1206년(희종 2년)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년) 입적하였다충렬왕 3년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 집필에 착수하였다.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 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하였다.9세 때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에서 취학했으며,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대웅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227년(고려 고종 14년) 선불장에 나아가 상상과에 급제한 이후 포산(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무주암·묘문암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1246년 선사가 되었다.대몽항쟁기 일연은 포산에서 22년을 보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1259년 대선사가 되었고, 1261년(원종 2년)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道義를 종조宗祖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에서 사굴산문(범일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함)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를 불일사로 개명했다.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골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283년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였다.1289년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였다.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와 죽허가 있다. 저서에는 『삼국유사』 5권, 『선문염송사원』 30권, 『화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