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개성적인 문체와 연극적 형식을 통해 사실과 허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해온 작가 최정나가 이번에는 “폭력의 객체와 주체의 완벽한 전복”을 선보인다. 『로아』는 작가정신 ‘소설, 향’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이자 최정나 작가의 첫 중편소설로,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고 가해자는 없는 세계 속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나’(로아)는 지금,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실에 누워 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뒤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동안 회피했던 기억을 마주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바라보기 위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날마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이 두려운 존재였던 언니, 상은이 되어. 피해자인 화자가 가해자로 분해 서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아동학대는 양육자의 ‘방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읽는 자로 하여금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참상을 그대로 목도하게끔 이끄는데 폭력이 왜,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신체적·물리적 폭력과 언어적·정신적 폭력이 얽히고설킨 광경이 펼쳐진다.


긍지를 갖는다는 건 앞으로의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망을 품는 것도 마찬가지, 희망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로아의 얼굴, 그 얼굴에 드리운 공포, 그러다가 다시금 차갑게 얼어붙는 로아의 눈빛을 보는 것은 나를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마비시켰다. 나는 어떤 열기 속에서 더욱 가혹해져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군가 죽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내려간 이 길에서, 누군가 구급차에 실려 가던 이 길에서, 누군가 다리가 골절되고 누군가 어린아이를 희롱하며, 누군가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지키려고 폭력을 행하는, 비극의 집들이 나란히 이어 붙은 이 길에서 저들은 어떻게 웃는가? 어떻게 까르르 웃나?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살아가는가?
작가 소개
지은이 : 최정나
201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전에도 봐놓고 그래」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 「한밤의 손님들」로 2018년 제9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줄래?』와 장편소설 『월』, 중편소설 『로아』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