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지금까지 조현정 시인이 보여준 시적 태도,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유지하면서도 이전의 시집들과는 조금 결을 달리한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그에 따른 질문과 모종의 실험이 시집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시라는 모종의 잔해」 연작시로 이루어진 2부에서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출판사 리뷰
시라는 모종에서 시를 싹 틔우는 모종의 실험들
― 조현정 시집 『시라는 모종의 잔해』
조현정 시인이 세 번째 신작 시집 『시라는 모종의 잔해』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103번으로 나왔다.
조현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대, 느린 눈으로 오시네』를 두고 시인 박제영은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살아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별다방 미쓰리>를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여자. 내 병(病)의 거울 속에서 타자의 병(病)을 토담토담 쓰다듬으며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노래 불러주는 여자. 지는 별에서 지는 방식으로 별의 중심까지 내려가 보겠다며 제 가슴에 무덤을 파는 삽. 빛의 중심에 다다르기 위해 그림자가 되어 어둠을 빚고 있는 손. 오늘은 지겠지만 내일은 이기자며 오늘은 어둠이 되겠지만 내일은 빛이 되자며 후후 부는 입김. 마침내 느린 눈으로 오시는 그대를 마중하는 그림자. 그이가 바로 시인 조현정이다. 눙치듯 던지는 그의 말들이 이 풍진세상을 건너는 당신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줄 테다.”
이번 세 번째 시집 『시라는 모종의 잔해』는 지금까지 조현정 시인이 보여준 시적 태도,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유지하면서도 이전의 시집들과는 조금 결을 달리한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그에 따른 질문과 모종의 실험이 시집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시라는 모종의 잔해」 연작시로 이루어진 2부에서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2부는 이 시집의 제목과 같은 제목인 「시라는 모종의 잔해」 연작시로 이루어져 있다. 총 15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시들은 아무래도 이 시집의 중심 지대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연작시의 제목이 그대로 시집의 제목으로 올라갔다는 점과 같은 제목으로 무려 15편의 연작시가 시집의 중앙에 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심’이라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문제는 제목의 ‘모종’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모종은 ‘某種’인가, 아니면 ‘모種’인가. 전자는 ‘어떠한 종류’를, 후자는 ‘옮겨 심으려고 가꾼 어린 식물’을 나타낸다. 시인이 한자 표기를 생략한 것은 이 두 개의 어휘가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두 의미 중에 어떤 것을 취하더라도 의미 자체가 정반대로 갈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인은 시가 ‘어떤 종류’이긴 하되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성체(成體)가 아닌 ‘새싹’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한자 표기 없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한자 표기를 했으면 하나로 굳어졌을 이 단어의 의미는 사실은 이런 의도적 방치를 통해 오히려 ① 어떤 종류, ② 어린 새싹 같은 것, ③ 이 두 가지를 합쳐 놓은 것 혹은 이 두 가지 의미에 걸쳐 있는 것의 세 가지로 더 확장된다. 중요한 것은 시가 이 세 가지 중의 무엇이든 간에 시인이 그것의 ‘잔해’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가 모종의 잔해라는 말은 시가 ‘모종’이라는 중간어를 걸치더라고 결국은 ‘잔해’라는 도착어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잔해는 절대적 중심이 없거나 해체된 것, 현전이 아니라 부재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웃을 일만 기다리는 걸 그만두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그럼 좀 나아질까. 잘 우는 법을 잊은 우리는 웃음을 멈출 수 있을까. 평온한 침묵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당신과 우리가 마음 다치지 않고 함께 우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러면 당신이, 당신의 과수원에서 과일이 들지 않은 빈 봉지들을 수없이 뜯어내곤 아무 일도 없는 저녁처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 최악이라는 말은 쓰지 말자. 해마다 최악의 기록을 경신하는 최악이라니.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그렇게 끝나는 세상은 없을 테니까.
언제부터인가 웃음도 울음도 한꺼번에 잃어버린 당신에게 술 한잔 사주고 싶은 저녁, 비가 여러 날을 이어 내리고 있다.
― 「시라는 모종의 잔해 6」 부분
“삶은 하나의 거대한 주름이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다른 곡면들과 만나 무수히 다양한 주름들을 만들어낸다. 산다는 것은 이 다양한 주름들로 이루어진 미로를 거쳐나가는 것이고, 시는 이 다양한 주름과 주름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바람의 언어이다. 삶의 주름은 ‘웃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거기엔 웃음을 그치고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주름도 있다. ‘최악’이란 주름도 종결이 아니다. ‘최악’은 ‘최악의 기록을 경신하는 최악’의 다른 잠재적 주름(들)을 항상 가지고 있다. ‘웃음도 울음도 한꺼번에 잃어버린’ 주름도 삶의 곡면 중의 하나이다. ‘시라는 모종’은 곡면으로 이루어진 그런 미로들의 잔해이다.”
반드시 횡단보도로 건너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평소 무단횡단을 일삼는 그와 부딪힐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구김 없이 다려진 흰 와이셔츠 정장 차림으로 횡단보도 위에 첫발을 반듯하게 내려디딜 때. 혹은 헤어지는 길에서 마주친 눈을 조금 길게 바라보다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 안개 낀 로터리를 무단 횡단할 때. 아! 거기서 그만, 가슴이 부서지는 대형 사고를 상상하며 “그의 품에서 죽었으면 좋겠네.” 중얼거리며 실없는 웃음이 날 때. 슬픔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감싸쥐는 나의 작은 손. “나 때문에 와이셔츠가 지저분해졌군요. 미안해서 어째요?” 이런 발칙한 멘트를 비눗방울 놀이처럼 하늘 가득 무지갯빛으로 펼쳐 보일 때. 홀로 중앙선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울상인 내게, 손을 흔들며 어서 건너오라는 손짓, 그 너머로 하얗게 빛나는 치아에 물린 미소를 보았을 때.
― 「주말시인」 부분
“시는, 서로 다른 길들이 만날 때, 하나의 강세가 다른 강세와 부딪혀 파장이 생길 때,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교차할 때, 그리하여 어느 한쪽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는 의미의 산종(dissemination)이 생겨날 때, 희미한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흩어진 물 분자들과 산란(散亂) 상태의 빛이 만날 때 겨우 뜨는 무지개처럼, 시는 서로 다른 에너지들이 꿈틀대며 ‘가슴이 부서지는 대형 사고를 상상’할 때 겨우 펼쳐진다. 조현정의 시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의 사이에서, 그 틈이 만드는 긴장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보여준다.”
“조현정은 절대적 중심을 허물어뜨리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자리에 시적 이야깃거리가 있음을, 그 틈새의 자리에 시적 사유가 끼어들어야 하고, 상상력이 가동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조현정 시인은 첫 시집 『별다방 미쓰리』로 시인으로서의 재기(才器/才氣)를 보여주며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고,
두 번째 시집 『그대 느린 눈으로 오시네』로 발효된 말(言語)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실레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세 번째 시집 『시라는 모종의 잔해』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며 시적 태도와 시 쓰기의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있는 조현정 시인이 이번에는 어떤 상을 받게 될지 궁금하다.
시인에게 가장 큰 상은 물론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상’(줄여서 ‘독심상’)이 아닐까. 이번 세 번째 시집이 꼭 ‘독심상’을 수상하기를 기대해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조현정
춘천에서 태어났다. 2019년 계간 《발견》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대 느린 눈으로 오시네』, 『별다방 미쓰리』가 있다. 민예총 문학협회, 강원작가회의, 서면문인회, 시문, A4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2021년 강원문화예술상, 2023년 김유정문학촌 제2회 실레작가상을 수상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우린 조금 친해진 걸까
주말시인│찔레나무 곁에서│혼잣말│아직도 그 집에 술래가 산다│새집증후군│돈구루마│화르륵│정情│흰소리 애인│앵두│통과│주름이 있는 풍경│복숭아│그 별에서 보기로 하자
2부. 너 아직도 시 써?
시라는 모종의 잔해 1│시라는 모종의 잔해 2│시라는 모종의 잔해 3│시라는 모종의 잔해 4│시라는 모종의 잔해 5│시라는 모종의 잔해 6│시라는 모종의 잔해 7│시라는 모종의 잔해 8│시라는 모종의 잔해 9│시라는 모종의 잔해 10│시라는 모종의 잔해 11│시라는 모종의 잔해 12│시라는 모종의 잔해 13│시라는 모종의 잔해 14│시라는 모종의 잔해 15
3부. 살지, 이렇게 힘든데 살지
왜를 지우면│내담內談│소원바위│헛것│불편한 관계│신세계│겨울 솔숲에서│한파예보│반추│창백하고 푸른│가시를 바르며│물딸기철이에요│스톡홀름 증후군│새들의 빈집│휴머노이드 마마│다행이라는 병
4부. 용감한 봄날
봄, 그 섬 ― 제주 4·3평화공원에서│봄, 동백을 보다 ― 청산도에서│동백을 들이다 ― 제주 다랑쉬굴 앞에서│돌아온 승탑 ―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봄은 이제 시작인걸요│백담사, 봄길│쎄무와 봄눈│동명항│예민銳敏│징크스 깨기│당신은, 울림통이야│재촉│첫사랑은 길에서 거반 다 늙었네│분홍낮달맞이꽃│그러다 봄이 오면 어쩌려구요
해설 _ 흩어지는 말들의 씨앗 ․ 오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