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옛날에는 누구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갔던 추억이 있었다. 어머니 손잡고 외갓집 갔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나 청소년들은 오래된 시골집이나 고택을 가본 기억이 거의 없다. 급격히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전래의 가옥들은 대부분 소멸됐고, 그나마 남아있는 가옥들도 대부분 위기에 처해 있는 게 현실이다.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바람도 그 바탕에는 우리의 흥과 신명이 묻어있는 우리 고유의 놀이문화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흥과 신명의 놀이마당이 바로 고택의 마당이었다. 지금도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내려오는 안동의 하회탈 놀이나 양주 별산대놀이, 강릉관노가면극 등도 다 고택의 마당에서 이루어진 야외공연 형식의 집단 놀이문화가 시작이었다.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도 단단히 자리잡아야 제2, 제3의 BTS가 나올 것이 아닌가. 이 책이 그런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널리 읽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전통과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배움으로써 이를 자신의 영역으로 활발하게 응용하고 펼쳐나갔으면 좋겠다. 이 책을 중심으로 이전 세대와 미래 세대가 교감하고 공감하고 화합하고자 하는 기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이 책을 출간하는 진정한 이유가 될 것이다.고택이란 무엇인가?고택은 말 그대로 오래된 집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나라의 전통방식에 의해 지어진 집이다. 초가집, 너와집 등도 있지만 대개는 기와집을 일컬을 때가 많다. 고택은 ‘적어도 백 년 정도, 또는 그 이상의 시간과 전통 방식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집은 사람이 사는 것을 전제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집에는 사람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남아있고, 사람이 일정한 공간에 머물게 되면 의식주와 관련된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한 자리에 오래도록 살면서 일정한 행동양식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화란 인간이 한 자리에 정주하면서 의식주 행위를 하면서 일정한 규범과 행동양식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문화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고 기술하고 있다.따라서 고택에는 인간의 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족을 이루어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부장적인 유교문화도 그렇고 조상을 모시는 장례문화나 제사, 혼례 등 관혼상제도 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언어, 지역이나 동네마다 다르게 쓰였던 사투리도 다 그 지역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고, 제사상에 올리는 제사 음식이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도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문화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문화를 지배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이나 그 작용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정신적 가치가 공유되고 일정 집단에 의해 지켜야 할 덕목으로 규범화된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화가 형성된 어떤 집단을 지배하는 어떤 정신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오래도록 가문을 형성하고 집단의 가치를 중시해온 고택에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을 것이다. ‘고택에는 정신과 철학이 있다’라는 이 책의 전제는 어쩌면 당연한 논리의 귀결을 넘어서 고택에 담긴 철학과 정신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이를 이 시대에 유용하게 적용하고 교육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계승해야 할 후손으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책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 고택에 담긴 철학과 정신신라 천 년 고도인 경주에 가면 ‘최부잣집’이 있다. 3백 년이 넘도록 만석꾼으로 영남지방 최고의 부잣집이었다. 이 집이 그처럼 오랫동안 부를 유지했던 이유를 들여다보면 다분히 어떤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런 가훈이 이 집안에 내려온다고 전해진다.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높은 벼슬에 올라가 권력을 탐하다 보면 정적이 생기고, 따라서 그동안 쌓아온 재물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것은 부를 가진 자가 주변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라는 가르침으로,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심을 잃고 원망을 사게 돼 결국 부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올 것에 대비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라남도 구례에 가면 섬진강이 보이는 곳에 ‘운조루’라는 큰 고택이 있는데, 조선 영조 임금 때 북방을 지키던 류이주 장군에게 임금이 목수를 보내 지어준 집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에게 하사받은 영광스러운 집인데도 이 집에는 굴뚝이 없다. 그 이유는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못 먹고 지내는데 이 집의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면 얼마나 더 배가 고플까를 생각해 그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집은 더 나아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나무로 만든 큰 쌀독을 밖에 내놓아 굶주리는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다. 어려운 시절 운조루의 이 쌀독으로 목숨을 연명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는 ‘조견당’이라는 아주 운치 있는 큰 집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특이하게도 안채 대청마루 건넛방을 ‘임신방’이라고 부른다. 이 집 주인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의 자식들이 장성하고도 혼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 집안 자식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혼례복을 빌려주어 혼례를 치르도록 하는 것은 물론, 신혼 첫날밤을 치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이 방을 내어주어 초야를 치르도록 했다. 열 달이 지나면 대게는 아기를 안고 이 집에 인사를 오는데 요즘 말로 ‘허니문 베이비’가 태어난 것이다.경북 안동에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고 있는 ‘학봉종택’이 있다. 집의 규모도 상당한데 이 집안에는 ‘해산방’이 있다고 전해진다. 임신한 며느리가 해산이 임박해지면 이 집 대문을 두드려 제발 우리 며느리가 이 집에서 해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집에서 자식을 낳으면 학봉 선생처럼 훌륭한 학자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는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집에서 해산을 하면 누구라도 아침에 쌀밥과 미역국을 대접해 주기 때문이다. 해산한 며느리에게 쌀밥과 미역국을 주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치스럽기는 하나 학봉종택의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위에 몇 가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행한 고택에 대해 일별해 보았다. 고택에 내려오는 이 같은 이야기는 고택에 철학과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증한다. 주변을 살피고 그들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전통은 우리나라 미풍양속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와 권력을 가진 고택의 주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주변의 어려움에 대해 냉정히 외면했다면 세상은 얼마나 팍팍하고 인정머리 없는 세상에 대해 원망과 원성이 높았을 것인가. 국가가 하지 못한 일들을, 조정의 임금이 미치지 못한 선정을 지역의 누군가가 대신해 베풀었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오늘날 상부상조의 철학과 정신이 면면히 살아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고택의 건축학적인 유산과 과학고택은 오래된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건축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건축주의 철학과 정신 등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같은 고택이라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고,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민간이 지은 한옥은 기본적으로 몇 가지 구조적 공통점이 있다. 우선 여자들이 살림을 하는 ‘안채’가 있다. 규모가 작으면 안채 하나로 이루어진 가옥도 적지 않다. 여기서 가족의 의식주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다. 여자의 살림 공간인 안채가 있다면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규모가 큰 경우가 많고 건축물의 격식도 한 단계 위인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남자들은 외부 손님도 맞이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연출하고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곤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집 주인들의 공간이라면 외부인이 잠시 머물거나 집주인들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행랑’이 있는데, 이 건물은 대개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대칭으로 지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라 해서 대문칸을 양 옆의 행랑보다 높게 올려 가옥의 품격과 가문의 품위를 살리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필요한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공간인 ‘사당’이다. 집안의 장손으로 계보를 이어 내려오는 종갓집에는 조상들의 얼과 넋을 기리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규모는 한 칸에서 세 칸 정도로 그리 크지 않지만 전체 가옥의 자리에서 보면 북쪽 언덕배기에 조금 떨어져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밖에 필요에 따른 생활공간이 더 늘어나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별채나 별당의 형식으로 집을 늘려나갔다. 지금까지도 입소문으로 전해 내려오는 큰 부잣집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게 마련인데 강릉 선교장의 ‘북창’, ‘남창’, 경주 최부잣집의 대형 곡식창고가 이에 해당한다. 선교장 마당 한쪽에 있는 큰 창고를 가지고 개화 이래 학생들을 모아 신식학문을 가르치는 ‘동진학교’를 만들었다니 창고의 규모가 남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안동 임청각에는 ‘군자정’이라는 보물로 지정된 아담한 정자가 있는데, 이 건물은 집 앞의 낙동강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 자체도 매우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옛날 건축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있다. 임청각의 행랑이나 다른 건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벽 가운데 있는 창호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요즘 같으면 창호를 형성하는 사방 네 군데 문선도리가 밖으로 드러나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벽 가운데 네모난 창호만이 공간 가운데 붕 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문선도리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벽체의 미장 안에 숨겨져 있는 방식으로 목수가 틀을 만들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여타 다른 가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방식의 창호 형태라고 할 수 있다.강원도 영월 주천에 있는 ‘조견당’이라는 선조로부터 7대째 물려 내려오는 집에는 지붕 위에 있는 세 개의 합각에 각각 해와 달, 별이 조형되어 있는 아주 독창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동양철학의 ‘음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동쪽 합각 아래 벽체에는 다섯 가지 채색 돌로 ‘화방벽’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색깔마다 동서남북, 가운데, 즉 다섯 방위, ‘오행’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지붕의 음양과 벽체의 오행을 합하면 ‘음양오행’인데, 다 알다시피 이는 동양사상과 동양철학의 시원이자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동양사상에서 음양오행에 무엇인가를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가의 건축물에 동양사상을 이렇게 옹골지게 조형한 가옥은 우리나라에서 이 집이 유일하다. 충남 논산에 가면 명재 윤증 선생의 후손들이 기거하는 명재고택이 있는데, 이 집에도 많은 과학과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공간이 적지 않다. 우선 안채와 안채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방이라고 불리는 창고로 쓰이는 건물이 북쪽은 가깝고 남쪽은 벌어진 형태의 평행이 아닌 사선으로 지어진 것이 특이하다. 이는 서양에서 흔히 말하는 ‘베르누이의 정리’라는 법칙을 실제 건축물에 적용한 흔치 않은 사례로, ‘기체가 좁은 공간을 통과할 때 유속이 빨라지면서 온도가 내려가는 현상, 기체가 넓은 공간을 통과할 때 유속이 느려지면서 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를 가옥에 원용한 것이다. 고방은 살림하는데 필요한 식품이나 반찬 등을 저장하는 장소로 이용했는데, 여름에 좁은 이곳을 바람이 빨리 지나가면서 온도를 낮추는 현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기가 서늘하니 냉장고가 없던 시절 쉬기 쉬운 음식물을 저장하는데 다른 곳보다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3. 고택에 담긴 문화유산과 스토리사람이 한 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삶을 영위하다 보면 어떤 일정한 생활 패턴이 형성되는데 우리는 이를 총체적으로 문화, 혹은 문화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기거하는 집도 오랜 주거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안되고 발전된 형태의 건축문화일 것이고, 우리가 입고 지내는 의복도 사시사철에 맞추어 때로는 편하게, 때로는 격식에 맞게 창의적으로 진보해온 복식문화일 것이고, 사람이 먹고 자고 결혼하고 성장하는 통과의례 모두가 다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국가마다, 종교마다 다 다르지만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를 보내는 방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문화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매장을 선호하는 방식이 있는가하면, 화장을 선호하는 민족도 있고, 보다 원시적으로 돌아가면 시체를 절벽에 매달거나 황야에 그대로 버려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방식도 존재했다.안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적인 도시 중 하나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고 조상의 지혜를 오늘에 구현하려는 사람들이 어느 도시보다도 많다는 얘기다. 오래된 고택도 다른 지방에 비해 훨씬 많다. 안동지방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하회탈 놀이가 있다. 다양한 모양의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각자의 춤사위를 펼치며 한바탕 돌아가는 놀이가 재미있고, 해학적이고, 풍자적이어서 볼 때마다 흥겨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기선 놀이가 문화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오래 전에는 고택의 넓은 마당이 하회탈 놀이의 무대였을 것이다. 주인이 내주는 탁주 한 사발이 무대의 흥을 더했을 것이다.강릉에 가면 선교장이라는 큰 저택이 있는데, 관동팔경을 찾는 많은 인사들이 찾아오는 그런 집이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집에 의탁하면서 종이와 물감을 얻어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오원 장승업이 이 집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당시의 습작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장승업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화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강원도 영월 주천에 가면 조견당이라는 오래된 집이 있는데, 이 집 울안에는 3백 년이 넘는 큰 돌배나무가 있다. 1680년대 한양에서 내려와 이 곳에 정착하면서 심은 나무라는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 이상 더 큰 돌배나무는 없을 것 같다. 이 집 어른들이 가을에 향기로운 돌배를 주워 술을 빚었는데 이 술이 근방에서 명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집 자손들이 다시금 그 명주를 복원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지금은 30도 담금주에 단순히 돌배를 담가 돌배의 맛과 향을 우려내 마시고 있으나 머지 않은 장래에 이전의 명주를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술을 빚는 것은 문화요, 술을 파는 것은 경제이다. 서양의 발렌타인, 조니워커를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올 가능성은 고택에 있다고 본다. 오래된 집에는 오래된 비법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된 집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어떠한 문화,예술이든지 이야기가 없고서는 그것이 문화, 예술로 설 수가 없다. 문화, 예술의 바탕에는 스토리가 있다. 아니, 스토리가 있어야만 문화와 예술이 존재한다. 영화나 연극도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뮤지컬, 오페라 같은 경우도 역사와 실화를 재구성한 스토리가 바탕을 이룬 경우에 성공하는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공연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고택에 한번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된 고택에는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묵은 이야기가 반드시 있다. 수백 년 세월의 무게와 그만한 역사의 주름을 안고, 다양한 문화의 지층을 가옥에 새기고 이를 관통하고 살아온 조상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으면 고택에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