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그날’ 이후 색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회색 연기에 휩싸인 그림자 인간이 꿈에 나타난 이후
그림 속 색깔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갈색…….
그림은 점점 회색빛으로 빛을 잃고 죽어 간다.
이지의 악몽 속 그림자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림자 인간은 왜 색깔을 훔쳐 가는 것일까?
기억에 갇힌 아이 이야기는 밤마다 반복되는 미스터리한 이지의 악몽으로 시작한다. 이지의 꿈속에서 그림자 남자는 회색 연기 속 검은 얼룩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점점 커지고 뚜렷해지면서 이지에게 소리를 지른다. 잡고 있는 것을 놓으라고. 절대 오른쪽을 보지 말라고. 급기야 남자는 발버둥 치는 이지를 움켜쥔다. 이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림자 인간은 눈앞에서 흐릿해진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다. 악몽에서 깨어나 정신이 들 무렵, 이지는 침대 머리맡에 그려진 벽 그림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색깔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 더 놀라운 건 사라진 색깔이 이지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이다.
이지는 지금 화가 달리가 사랑했던 그림 ‘기억의 고집’처럼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 있다. 달리의 그림 속 흐물거리는 시계가 항상 같은 시간을 보여 주는 것처럼,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지만 이지의 기억은 한 시간에 머물러 있다. 밤마다 검은 그림자 남자로부터 색깔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거미들이 몸속을 돌아다니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색깔이 증발해 버리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결국 이지의 ‘기억의 고집’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림자 인간이 ‘보지 말라고 소리치지만’ 외면할 수 없는,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움켜쥘 수밖에 없다. ‘기억’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밭은기침이 터지고 폐는 맹렬히 치솟는 빨간 분노로 가득 찼다. 나는 온 힘을 끌어모아 남자에게 저항했다. 나는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해 댔다. 불쑥 이런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악몽 속 그림자 인간과 사라진 색깔이 분명 관련이 있을 거라는. 남자가 나타난 시기와 색깔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 일치했다. -본문 중에서
사라지는 색깔의 의미그림자 인간이 색깔을 훔쳐 가는 그곳은 화가인 엄마가 이지의 중요한 순간들을 그려 놓은 벽 그림이다. 갓 태어난 이지, 아장아장 걷는 이지, 스키를 배우는 이지, 연극에서 줄리엣을 맡은 이지……. 이지 가족에겐 행복한 기억의 기록들이다. 하지만 그림은 마치 누군가가 색깔의 힘을 빼앗아 갈 작정으로 스펀지를 대고 누른 것처럼 창백해져 간다. 이지 가족의 행복했던 순간이 생명과 빛을 잃어 간다. 색깔 도둑은 왜 이지의 꿈에서만, 눈앞에서만, 머릿속에서만 색깔을 빼앗아 가는 것일까.
이지에게 그림 속 색깔들은 엄마와의 추억이자 사랑이다. 그런데 지금 이지의 엄마는 곁에 있지 않다.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태롭다. 이지의 기억이 놓지 못하는 암흑의 그날, 이지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고가 난 그날의 모든 일을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를 찾아갈 수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조차 없다. 때문에 이지가 사랑하는 엄마의 생명이 나날이 위태로워지듯 이지가 사랑하는 그림 속 색깔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지는 그 색깔을 지키기 위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내 사랑하는 나의 벽을 올려다보자마자 배 속의 거미들이 우르르 앞다투어 살아났다. 악몽을 꾸는 것이 나뿐이라면 색깔이 사라진 게 보이는 것도 나뿐일지 모른다. 아빠에게 색깔이 보이는지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이미 난 답을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색깔 도둑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일까. 왜 내게서 색깔을 훔쳐 가는 걸까. 답 없는 질문들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본문 중에서
돌아온 색깔과 감정의 치유 이지는 하루하루가 절망스럽다. 그런 이지에게 옆집에 이사 온 또래의 남자아이 토비가 온전하지 못한 백조를 함께 보살필 것을 제안한다. 이지와 토비는 백조에게 스파이크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먹이를 챙겨다 주고 집을 지어 준다. 어쩌면 스파이크에게 자신들을 투영하며 응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토비는 이지에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허리를 다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자신의 ‘그날’을 털어놓는다. 이지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음악회에 늦었다고 짜증을 내고 지름길로 가라고 엄마를 다그쳤던 이야기를.
이제 이지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그날을 직면한다. 그러자 악몽 속 이미지들이 일련의 사건으로 재배열된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어긴 차가 돌진하던 순간, 구급차 사이렌, 운전대 위로 쓰러진 엄마. 그날의 이미지들이 떠오르면서 이지는 그림자 인간과 사라진 색깔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죄책감이 사고 현장의 참혹함과 구조대원의 모습에 오버랩되어 만들어진 공포라는 걸 깨닫는다. 이지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생사를 오가는 엄마를 위해, 충격에 빠진 아빠를 위해, 토비를 위해, 스파이크를 위해, 사라져 버린 모든 색을 위해. 움켜쥐고 있던 기억과 죄책감을 놓았기에 흐르는 눈물이다. 마침내 벽 그림의 색깔은 다시 돌아오고, 이지는 날아오른 스파이크가 남긴 깃털에 담긴 행운을 전하러 엄마에게 향한다. 파란 하늘과 빨강, 노랑, 주황으로 물든 늦가을 낙엽의 빛깔을 마음에 가득 담아.
“어젯밤 꿈에 색깔 도둑이 그만 놓으라고 소리쳤어.”
“바로 그거야. 네가 계속 움켜쥐고 있었잖아. 그 끔찍한 날을.”
“무슨 말이야.”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놓아 버려야 해. 줄곧 마음속에 끌어안고 있었잖아. 이제 놓아 버려야 해.”
“못 해, 토비.”
“할 수 있어. 내가 알아. 넌 할 수 있어.”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