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괴테가 스물다섯 살 때 쓴 첫 소설이다. 법학도인 젊은이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로테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거절당하고,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가 정작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른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출간되자마자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이 작품이 그토록 선풍적이었던 것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던 당시의 통념을 깨고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여 사회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며 명작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이 작품에서 비롯된 '베르테르 효과'(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이런 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라는 용어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에 충실한지 알 수 있다.
출판사 리뷰
영혼을 울리는 사랑의 문장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블랙 에디션 출간!
동서고금을 초월한 명작을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
소장 가치 업그레이드
과거나 지금이나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사랑의 아픔이라는 감정이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별한 감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베르테르일 수 없고, 샤를로테일 수는 없지만, 내 사랑이 그 누구의 사랑보다도 특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사랑의 열병’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은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스물다섯 살 때 쓴 첫 소설이다. 법학도인 젊은이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로테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거절당하고,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가 정작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른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이 작품이 그토록 선풍적이었던 것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던 당시의 통념을 깨고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여 사회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며 명작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이 작품에서 비롯된 ‘베르테르 효과’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이런 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라는 용어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에 충실한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문학적 표현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계절의 변화에 인간의 감정 변화를 대입시켜서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내면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봄에는 사랑의 시작이, 여름에는 사랑의 강렬함이, 겨울에는 상실감이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계절 변화가 사랑에서 비롯된 내면적·감정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장치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편지글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독자들을 고백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인간 내면을 여과 없이 전달하고,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고 말한 바 있듯,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면서 괴테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의 흡입력을 드높이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일생 동안 잊지 못할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사랑의 아픔은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별한 감정이며, 온 우주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베르테르일 수 없고 샤를로테일 수는 없지만, 내 사랑이 그 누구의 사랑보다도 특별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묻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알베르트가 누군가요?” 내가 새를로테에게 물었네. 그녀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우리는 다음 동작을 하느라 서로 떨어져야만 했네. 우리가 다시 서로의 앞을 스쳐 지나갈 때 보니, 그녀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더군. “당신에게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행진을 위해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네. “알베리트는 좋은 분이세요. 저는 그와 약혼한 사이지요.”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는데도(오는 도중에 아가씨들에게 들었으니까 말일세.) 전혀 새로운 말 같았네. 짧은 시간에 이토록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된 그녀와 이 이야기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일세. 머리가 혼란스러워 내가 대열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에 전체적인 진행이 엉망이 되어 버렸지. 하지만 샤를로테가 침착하게 나를 이끌어 제자리로 데려와 주었다네.
사랑하는 빌헬름,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나는 나 자신이 두렵네. 샤를로테에 대한 나의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신성하며 형제애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내 영혼이 세속적인 욕망으로 더럽혀진 적이 있었는가? 하지만 단언하지는 않겠네. 그런데 지금, 그대 밤의 환영이여, 이렇게 상반되는 작용은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어떤 힘에 기인한다고 말했던 그 사람들이 너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었구나! 지난밤 일을 이야기하려니 떨리는군, 나는 그녀를 가슴에 꼭 껴안고 사랑스러운 입술에 셀 수 없는 키스를 퍼부었고, 그녀는 그에 대한 답으로 부드럽게 사랑을 속삭였네. 내 눈길은 그녀의 황홀한 눈빛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네. 맙소사! 그런 행복을 다시 느끼면서 그 환희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 기뻐하는 것이 죄가 될까? 샤를로테! 샤를로테! 나는 길을 잃었소! 내 감각은 혼란에 빠지고 내 기억은 엉망이 되었으며 내 두 눈은 눈물로 흠뻑 젖었소.-나는 병들었고 그런가 하면 또 건강하오.-나는 바라는 것도 없소.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소.
훌쩍 떠나고 나니 얼마나 행복한지!
작가 소개
지은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 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 ≪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목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부
영문판
괴테의 생애와 연인들
작품 해설
괴테 연보
괴테의 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