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
어째서 그토록 강렬하게, ‘진리’라는 느낌을 주는가?
“세상을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죄가 되나요?”
한 사람 몫의 진실을 향해 생을 걸고 경계를 넘는 텍스트의 모험하미나의 신작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가 동아시아의 문학·예술 브랜드 물결점의 첫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쓴 글을 가려 뽑아 대면케 하고, 충돌시키고, 맞물리게 하여 엮어낸 혼종의 텍스트다. 장르로는 논픽션, 에세이, 시, 희곡, 강연록, 대화록, 회고록을 넘나들고, 주제로는 과학과 비과학, 머리와 몸, 이성과 광기, 빛과 어둠, 실세계와 가공물을 넘나들며 이 책이 도달하려는 곳은 어떤 장관이 펼쳐지는 자리. 앎의 함정을 넘고 알지 못함의 두려움을 쥔 채 어둠 속에서 저자가 마주한 진실의 풍광은 “엄청나게 아름다웠고 엄청나게 슬펐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와 중세 마녀가, 세계문학의 대문호와 언어가 없는 여자들이, 칼 세이건과 바리데기가, 계몽의 빛과 계시의 빛이 함께 등장한다. 인공지능(AI)과의 긴 대화가 있기 전, 바닷가 작은 웅덩이의 웅성거림이 있고, 피해와 가해가 있기 전, 그렇게는 가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부분이 있으며, 모성이란 신화가 있기 전, 아이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 이들은 하나의 서사를 위해 복무하지 않고, 그저 경합하며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경험이 그렇고 우리 자신이 그러하듯 여러 겹의 목소리와 복수의 서사로. 그래서 어떤 진실은 기존 세계의 균열 사이로 비치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서야만, 나를 갈라 나를 꺼내야만 만날 수가 있다. 그렇게 갈라진 나는 죽고 꺼내어진 내가 살아서 질문을 바꾼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로. 이것은 저자가 순수한 매혹과 열렬한 투신으로 보여주는 우리 가능성의 비전이기도 하다.
공중 도시의 붕괴
―과학이라는 통과점과 ‘두 개의 언어’책은 두 개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막 우주에 관해 배우고 “세계를 알아가는 일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열일곱 소녀. 그리고 바닷가에서 “사랑했던 도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거듭 목격하는 ‘나’. 하나의 앎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 ‘공중 도시’의 붕괴는 한때 흠모하고 추종했던 지식이 실제 삶과 어긋나며 해체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감각과 배움이 하나였던 때의 희열은 혼란으로 바뀌지만, 저자는 그 균열을 힌트 삼아 도시를 허물고 또 다른 도시를 지으며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다. 그 도시도 언젠가 허물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붕괴와 되세움은 우리가 살면서 세계를 알아가기를 멈추지 않기로 할 때에, 그러면서 최대한의 진실에 다가서기로 마음먹을 때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압축적으로 은유한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애초 페미니즘 관점에서 과학사를 들여다보는 책으로 기획되었다.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쓰기 시작한 과학 칼럼들이 그 토대로, 차별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과학에 헌신해 온 여성 과학자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오해와 차별, 혐오를 조장하는 과학을 비판하며, 지구적 차원에서 모두를 위한 더 나은 과학을 전망하는 이 글들은 과학사 연구자로서 하미나의 넘치는 호기심과 해박한 지식을 담아내며 많은 독자의 관심과 응원을 받았다. 연재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우울증 측정 지식의 형성을 연구한 석사논문을 쓰면서 거기서 빠지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첫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펴냈다. 책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두루 읽히며 고통받는 여성에게 그들의 언어를 돌려주었고, 대중과 출판계 안팎에서 호평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런 한편, 첫 책을 쓰기 전후로 저자의 내면에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원래는 과학철학 꿈나무”였고, “이 학문을 사랑해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나, 연구를 지속하는 동안 학계에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배움을 계속해 나갈 수 없음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원은 내게 공부하는 공간이기보다 끊임없는 가스라이팅과 수치심 속에서 자기 증명을 반복해야 하는 곳이었다. (…) 어쩌면 대학원에 다니면서 페미니스트 활동가 일을 했던 것, 같은 학교 교수였던 사람을 상대로 성폭력 재판을 길게 이어가야 했던 것, ‘나’를 삭제해야 하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 과학철학은 꽤 보수적인 학문이어서, 과학의 본성을 상당히 내재적이고, 언어적인 관점으로 탐구하는 듯했다. (…) 이런 문제를 푸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도쿠 같았다. 스도쿠 퀴즈를 풀면 머리를 굴리며 해답을 찾아 나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할수록 똑똑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러나 스도쿠는 스도쿠일 뿐, 스도쿠 바깥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오직 스도쿠 안에서 전능한 기분을 느낄 뿐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나는 스도쿠 같은 공부는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앎과 삶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다.(133~134)
또다시 하나의 도시가 헐리는 순간. 거기서부터 시작된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저자의 앞선 작업들과 다른 방식으로 ‘앎’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작업들을 바닥에서 떠받치며 아우르는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한 번의 무너짐 이후 목적지였던 과학이 통과점이 되자, 공고해 보였던 기존의 세계에 금이 가며 저자는 이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서구세계 남성 위주의 서사로 점철된 주류 과학은 그가 살면서 경험으로 터득한 앎에 부합하지 않았다. 차이를 강조하는 과학, 여성의 자리를 빼앗는 과학, 여성을 역사에서 지우는 과학, 뒤처지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주체에서 밀려난 자연을 돌보지 않는 과학은 그에게 ‘야만’으로 보일 뿐이었다. 거기서 편견을 걷어내고 권위를 떨궈냈을 때에야 과학을 버리지 않고도 더 나은 과학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여성을 배제하지 않는 과학, “관습과 직관의 뺨을 후려치는” 과학, 지구와 뭇 생명을 돌보는 과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허물기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자연과 몸을 맞대고 어린아이의 눈을 되찾으면서, 과학적 지식뿐 아니라 “소위 비과학적이라 여겨지는 앎”을 통해서도 세상을 알아갈 수 있음을 예감한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난 앎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천재지변 등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일이 벌어졌을 때 과학을 대신해 세계를 해설해 주던 앎의 체계,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서구화 · 식민화되기 이전에 해당 지역에서 토착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앎의 체계, 그 덕에 자기들만의, 자기들다운 방식으로 공동체의 정신과 육체를 보살핀 앎의 체계…… 난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55)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두 개의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가 과학사와 과학비평에 책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단지 과학책이 되는 데서 멈출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오랫동안 명징한 이성으로 엄격한 과학 연구의 문법 위에서 ‘머리-글’을 써온 저자에게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은 미칠 만큼 죽을 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머리에게, 몸은 말한다. “아니, 너는 죽어야 해. 하지만 잘 죽어야 하지.” 여자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 먼저 죽은 여자에게 배운다. “이제는 두 개의 언어로 말하면 된단다.” 이것은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신비에 눈 뜨기를 너무나 자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먼저 깨어난 사람들이 거는 주문이기도 하다. ‘너를 갈라 너를 꺼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자는 속삭인다. “어쩌면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보다 느끼는 것에 감탄할 때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결말이 없이 이어지는 모험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너짐과 다시 세움이 거듭되는 한 배움은 끝나지 않으며, 이 여정에는 고정된 진실도 없다. 오로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것을 향해 나아가느냐가 있을 뿐. 이 모험은 나아감인 동시에 되돌아감이다. 진보인 동시에 회복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배우고 느끼며 어딘가로 흘러왔고, 세상에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만물을 관장해 온 자연의 섭리와 세대를 초월하여 간직되어 온 원초적 감각이 있다. 이 구불구불한 여정에서 어떻게 진정한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동시에, 세계와 진실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였을까, 그들이 우리를 정의하기 전에는.” 광기와 죽음 속에서 튀어나온 저자는 여러 차례 표현을 바꿔가며 책에 던져진 질문에 답한다. “그건 정상에서 비정상으로의 탈주가 아니라 오랫동안 인류가 가져왔던 감각을 회복하는 것”(345~346)이라고.
진실을 감당하는 글쓰기인류가 외계로 쏘아 보낸 지구 소개 음반인 ‘보이저 골든 레코드’ 이야기로 시작한 이 책은 화산과 바다의 가장자리, 지하 1100미터 실험실과 연극 무대를 지나 악령 들린 소녀와 무당, 중세 성녀를 만난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여성 과학기술인),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어”(프로듀서 민희진),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박경리 선생), 그런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야쿠시마일본원숭이 새끼가 나무를 타고 놀며 작은부레관해파리는 군체를 이루어 바다 위를 떠다닌다. 언뜻 갈지자처럼 보이는 책의 전개엔 일관된 서사가 없다. 이는 저자가 지나온 궤적과 비슷하게도 보인다. 과학 꿈나무, 과학사 연구자, 과학기자이자 과학 저술가. 어느 날부턴 장르 불문 다종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 활동가, 퍼포머, 다이버. 홀연히 한국을 떠난 베를린 체류자, 갑자기 돌아와 방송에 출연한 페미니스트…….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이 책만큼, 이 저자의 행보만큼 일관된 것도 없어 보인다. 그는 어둡고 뒤틀리고 이상해진 것들에 깃든 슬프고 아름다운 진실에 반했고, 매번 그 사랑을 결행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혼란하고 무서웠을지언정, 자기를 던져 세상과 만났고 진심을 다해 세상을 배운 뒤에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았다. 이 책이 뚜렷한 줄거리 대신 복잡한 관계도를 그리고, 하나의 서사로 똬리를 트는 대신 복수의 세계로 꿈틀거리는 듯이 보인다면, 저자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그러하고 그가 보는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배치를 그가 세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표현, 바뀔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믿음의 증거로 보아도 될까? 이 세계 어딘가에 폭력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세계는 살아 있는 것, 바뀔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테니까. “그것은 뒤에 올 사람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니까. 그러니 ‘무엇을 썼는가, 당신은 누구인가’를 물으려 하기보다, 이번에도 질문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이 글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로.
글을 쓰는 하미나는 먼저 자기 앞에 진실하고자 한다. 그가 진실한 글을 써나가는 과정은 앎을 획득해 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게 보인다. “글로 쓰려고 하면 할수록 핵심에서 계속 벗어”나는 경험이 있고, 그 “경험에 대한 어떤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데 글이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과학 지식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때 과학 너머의 앎을 기웃거렸듯이, 이번에도 그는 몸의 반응, 느낌과 정서, 심상, 꿈과 환각, 계시에 기대어 쓴다. 그렇게 쓰인 글은 옮음을 증명할 수 없다. 다만 더없이 진실하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뿐. 저자는 이를 여성적 글쓰기, 물 같은 글쓰기 혹은 몸-글이라고 부른다. 몸-글은 조화와 화합이 아닌 분열과 혼란에서부터, 기억이 아닌 망각에서부터, 자기가 아닌 자기 없음에서부터 쓰인다.
머리-글이 통제하며 쓴다면 몸-글은 통제하지 않습니다. 통제를 향한 의지도 없습니다. 머리-글이 설계도에 따라 계획대로 자신을 만들어 낸다면 몸-글은 흐름을 쫓아가며 씁니다. 몸-글은 서둘러 받아 적습니다. 몸-글은 때로 쓰인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혹은 이해되지 못한 것을 쓸 수 있습니다. 몸-글의 자기 없음은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아는 데에서 옵니다. 몸-글은 장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라봅니다. 몸-글은 경험이 자신을 통과하게 내버려둡니다. 몸-글은 자신을 도구로서 씁니다. 머리-글이 권위 있는 근거를 필요로 한다면 몸-글은 자신의 느낌을 신뢰합니다. 몸-글이 글쓰기에 활용하는 것은 논문이나 기사, 칼럼 등이 아니라 몸의 반응, 느낌과 정서, 심상, 꿈과 환각, 계시 등입니다. 몸-글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더없이 진실하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72~73)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깨어남, 살아 있음『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는 진실이란 말이 수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며 등장한다. “과학의 목표는 곧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다” “자신 안의 더 진실한 자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믿고 따르는 일” “불편한 진실을 회피해 왔음을” “예를 들면 두 가지의 진실이 서로 경합한다든가” “진실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왜 그렇게 진실이 중요할까? 어느 시점부터 저자에게 이 질문은 힘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가 되었다. 글을 쓰고 언어를 갖게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때로 다른 존재의 생을 훔치거나 파괴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많은 작가가 타인의 삶 일부를 가져와 자기를 위해 썼듯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마녀재판의 관점과 문법을 빌려 자연을 고문하고 심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그것이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닌, 이해되고 정복되어야 할 기계적 존재”로 여기게 했듯이. 저자는 꿈에서 자신이 그러한 영향력을 부지불식간에 발휘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쏟아 내는 문장은 아름다웠고 힘이 넘쳤다. 옳소, 옳소. 사람들은 크게 동조했다. 그러는 동안 버스 바깥에서 휘청대며 걷던 친구가 쓰러졌다. 연설을 하다 놀란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를 구해 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 행동을 더욱 칭찬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도 구해내는 윤리적인 사람이라며 박수를 쳤다. 어느새 나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동안 나는 별안간 꿈의 등장인물로서 또 서술자로서 내가 하고 있던 짓에 소름이 돋았고 경악하다가 잠에서 깼다.(58)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서 하미나가 발휘하는 지성이 특별한 이유는, 앎을 대하고 행사하는 그의 태도가 이토록 깨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역사와 권위가 아닌 맥락과 좌표로 가늠되어야 함을 그는 여느 지식인처럼 현실의 복판에서 이성의 언어로 이야기할 줄 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그러는 동시에 자기 안에서 하강을 거듭해 꿈으로까지 그 앎을 가져가 실천해 낸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의 복잡성을 의식하고 힘과 권위의 파급력을 경계하면서 결국 꿈속에서도 자기를 갈라 자기를 꺼내고야 만다. 그리고 꿈의 언어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이야기해 버린다. 꿈에서 깬 그는 기꺼이 취약해지기를, 겸허해지기를 택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줄 안다. 어떤 진실에 다가서는 일은 그런 식으로도 가능하다.
저자는 글쓰기가 막혔을 때, 스스로에게 묻고는 했다. “내 주장이 옳다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기억되거나 알려지려는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타인과 관계 맺고 세상과 연결되려는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볼 수 있을까. 레슬리 제이미슨처럼 말하자면, “보는 것, 계속해서 보는 것, 필요한 것을 얻자마자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 점점 더 복잡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써준 내러티브를 전복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일”.(레슬리 제이미슨, 송섬별 옮김,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반비, 2023, 206쪽) 김혜순 시인에 따르자면, 징징거리기, 죽기, 발명하기. 엘렌 식수식으로 적자면, “자신에게로 귀착되지 않는 존재의 활동 (…) 여자인 동시에 세계-안에서-돌보며-나아가는-자”(엘렌 식수, 황은주 옮김, 『리스펙토르의 시간』, 을유문화사, 2025, 133쪽) 되기. 그렇게 되어 “인간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에 답할 수 있을까. 우리 각자의 진실을 더 큰 가능성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인가? 이것은 내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끝없이 탁상곤론하게 만든다.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어떤 진실은 어째서 그토록, 강렬하게, ‘진리’라는 느낌을 주는가. 인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보이고 들리게까지 만드는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넘어 집단의 경험으로도 나타나는가. 그 인식은 어떻게 눈앞의 인간을 적으로 만들거나 가해자로 만들거나 악마로 보게 만드는가? 어떻게 ‘정의’ 혹은 ‘평화’를 위해 그를 죽여도 된다고까지 밀고 나가게 만드는가?
배움은 예상한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단계가 새로운 도전이다. 공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두려워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뿐. 그런데 두려움은 사물을 본래와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한다. 히스테리아 증상을 보이는 여성 앞에서 공포를 느꼈던 남성이 그들을 ‘처치’하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배움의 과정에서 공포를 느낀다는 건, 바꿔 말하면 무언가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 나는 상상해 본다. 「랑종」의 ‘밍’이 자기 얘기를 다룬 영화를 직접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엑소시스트」의 소녀가 직접 카메라를 들 수 있었더라면 영화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이 얼마나 주변화되어 왔는지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남성 중심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또한 그 속에서 불화하며 미끄러지는 남성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남자들이 통제력과 권력을 잃을 때 오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당사자의 증언이 필요하다. 남성 호모소셜 사회가 당신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이야기해 달라. 형님의 세계가 당신을 당신답게 살게 하였는가? 그러지 못하게 하였는가? 그걸 말하는 건 수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