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자코테는 ‘시집’이라는 용어보다 그 대안으로 ‘수첩’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여기에 파편적인 시와 산문들을 수록했다. 글에는 벚나무, 모과나무, 작약, 접시꽃, 비를 흠뻑 맞은 나무와 풀들이 나오는가 하면, 천공을 뚫을 듯 비상하는 종달새와 말벌도 나온다. 세계의 온갖 사물과 현상들 앞에서 자코테는 확정적인 언어를 경계한다. 그것들에 빗대어 자신의 서정을 간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냥 거기 있는” 자연을 그린다.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선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싶어서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이 기쁨이,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별처럼 폭발해 그 별가루들을 우리 안에 퍼트렸을 것만 같다. 시선 속에서 빛나는 약간의 별가루들, 우릴 뒤흔들어놓고, 홀리고, 기어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섬광을, 이 파편화된 반사광을 자연 속에서 불시에 포착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 반사광들이 내겐 결코 빈약하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몽상들의 기원이니까.
이 열매들은 어두운 초록 속에 붉은 것이 흐르는, 붉고 기다란 송이 같았다. 요람 속, 아니면 이파리들로 짠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열매들. 초록 속의 붉음, 만물이 서로 미끄러져들어가는 시간, 느리고도 조용한 변모의 시간. 거의, 전혀 다른 세계가 현현하는 시간. 어떤 것이 문돌쩌귀 위에서 돌아가는 시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권한이 이젠 우리에게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단어는 닳고 닳았다. 물론, 나로서야 아름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안다. 그렇긴 해도, 생각을 해보면 나무들에 대한 이런 판단은 이상하다. 나로선, 그러니까 정말이지 세상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는 나로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면, 그게 바로 세계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기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전언을 가장 충실히 번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필리프 자코테
시인이자 번역가. 1925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1950년 프랑스로 귀화했다.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화가인 아내와 함께 프랑스 남동부 드롬 지방의 그리냥에 정착했다. 그의 시에는 이 지방의 풍경이 많이 담겨 있다. 횔덜린, 릴케, 만델스탐, 노발리스, 토마스 만, 웅가레티 등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프랑시스 퐁주, 장 폴랑, 이브 본푸아, 자크 뒤팽 등 여러 작가들과 교유했다. 1953년 첫 시집 『올빼미L'Effraie』를 발표한 이후, 다수의 시와 산문, 평론을 집필했다. 생전에 그의 작품 선집이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 총서로 기획, 출간되었다. 2021년 그리냥 자택에서 95세의 나이에 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