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흙과 모래의 이미지로 섬세하게 빚어낸 인물의 심리『샌드힐』의 첫 장면은 지훈이 학교에 가길 거부하며 교문 앞에 엎드려 흙을 움켜쥐는 것으로 시작한다.
라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손톱을 세워 흙을 움켜쥐었다. 나를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금세 포기한 라희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모래바람 때문에 뿌예진 눈앞에 아빠의 검은 구두가 보였다.
_본문 중에서
반항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지훈은 아빠의 손에 가볍게 들어올려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교실 안으로 향한다. 이곳은 중국의 한 사립 학교, ‘얼어붙은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 ‘펑동’이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인 형이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부모님마저 이혼한 뒤 지훈이 아빠를 따라 오게 된 낯선 학교의 이름이다.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모래 먼지 가득한 땅에서 지훈은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형에게 물려받은 조각칼로 흙을 빚어 토기 인형을 만드는 일은 지훈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이방인을 향한 아이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지훈은 흙을 빚고 또 빚는다. 이 작품은 진시황의 병마용 속 흙으로 만든 수많은 병사들과 지훈이 만든 토기 인형의 이미지를 반복해 보이며 지훈의 심리를 조각한다.
나는 무릎 위에 동그란 흙덩이를 놓고 흙 속으로 조각칼을 넣었다. 칼이 흙을 파고들자, 흙 속에서 점점 표정이 드러난다. 몸속에 피가 조금씩 도는 느낌이다. 병마용의 병사들처럼 표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조각하려면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반 아이들이 제격이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전생에 내 적군이었다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어떤 아이를 다 조각하고 나면 그 아이에 대한 미움도 희미해진다.
_본문 중에서
지훈은 폭력에 순응하고 냉소하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흙을 빚는 행위를 통해 내면에서 치열한 싸움을 해 나간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훈은 종종 자기 자신이 모래가 되어 허물어지거나, 지키고 싶었던 형이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환상을 본다. 흙을 단단히 뭉치고 쓰다듬는 지훈의 행위는 자꾸만 부서지는 마음을 그러모으는 의식과도 같다.
■ 정체성과 소속감, 그 사이를 오가는 진짜 청소년의 이야기혼자 지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지훈과 달리, 라희는 혼자가 될까 봐 불안에 떠는 아이이다. 라희는 한국인 유학생 선배 무리를 따라다니며 그들처럼 ‘세지고’ 싶다는 소망을 빈다. 라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방인임에도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권력이다.
“왜 거길 못 끼어서 그렇게 안달이야.”
라희는 날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혼자 견딜 수 있겠지만 나는 못 견뎌. 너나 지금처럼 흙이나 빚으면서 왕따로 살아. 난 선배님들이랑 놀 거니까. 선배님들이랑 놀면 눈도 안 깜빡여. 자신감이 생겨서 틱도 사라진다고. 얼마 전에 나 괴롭힌 애들 있지? 선배님들이 혼내 줬어. 이제 아무도 내 앞에서 찍소리 못 해. 너 같은 왕따는 평생 모르겠지만, 이런 걸 소속감이라고 하는 거야. 알겠어?”
_본문 중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둘이지만 ‘믿을 만한 어른이 없는 세계’를 버티는 이방인이라는 커다란 공통점은 지훈과 라희를 무엇보다 더 결속시킨다. 라희는 멀찍이 떨어져 걸으면서도 지훈을 걱정하고 말을 걸어 주는 유일한 존재이다. 지훈은 소속감에 집착하는 라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라희가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 갖고 싶어 하는 지갑을 훔치기까지 한다.
지훈과 라희의 선택은 예기치 않은 사건의 격랑으로 두 사람을 몰고 가지만 그럼에도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소년기에 낯선 땅에 떨어져 격동의 사춘기를 겪는 이들의 모습이 독자들이 지나고 있거나 또는 이미 지났을 청소년기의 모습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과 국경을 건너 질주하는 서사지훈의 다소 소극적인 저항은 곧 형에게서 기계를 뗄 거라는 아빠의 선언에 불붙어 적극적이고 대담한 계획으로 이어진다. 학교 안 폭력의 주동자인 류웨이에게 대항하며 신뢰를 쌓은 친구 장의 사정이 더해져, 둘은 압록강 근처 단둥까지 동행을 약속하게 된다.
둘의 가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암표를 속아서 사고, 가방을 도둑맞고, 취객에게 위협을 당해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장은 다리를 크게 다치기까지 한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최악의 전개는 독자를 단숨에 지훈의 옆자리에 앉힌다. 휘몰아치는 서사와 함께 흡인력을 더하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와 살아 숨 쉬는 듯한 캐릭터의 매력이다.
“어디서 왔어?”
“눈깔은 뒀다 뭐 하니. 미국에서 온 거 같니? 아까 탈북이라 얘기하지 않았어?”
“남한에는 뭐 하러?”
“공부하러. 학비가 공짜니까.”
“어떻게 가려고?”
단발머리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기사 쓰니? 얻어먹는 주제에 무례한데. 다롄에서 인천 갈 거다. 단둥보다는 경비가 덜 삼엄하니까. 됐니?”
_본문 중에서
지훈이 다롄으로 가는 길에 만난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컴컴한 트럭 안에 「봄날」 노래를 틀고 따뜻한 봄바람이 비집고 들어오게 한다. 트럭에서 뛰어내려 뛰는 걸음에도 망설임이 없이, 자기가 가야 하는 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단발머리의 뒷모습은 지훈에게도 적절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을까? 지훈에게 여전히 형이 있는 한국 땅은 멀고 가는 걸음에도 확신이 없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독자들은 지훈의 안부를 묻고 또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최악으로 치닫는 전개의 끝에 희망과 맞닿아 있는 작품의 메시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 경계와 금기를 넘어, 하서찬 작가가 그리는 리얼 월드제10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단편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동화집 『빨래는 지겨워』로 독자들과 만났던 하서찬 작가가 청소년 소설로 돌아와 그때 그 독자들에게 다시금 말을 건다.
제목인 ‘샌드힐(sandhill)’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샌드힐은 영국의 ‘섬머힐(summerhill)’ 학교와 정확히 반대되는 학교 ‘펑동’을 은유한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학교를 지향한다는 섬머힐 학교의 교육 방향과 달리, ‘샌드힐’의 배경이 되는 학교 펑동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폐쇄적이다. 하서찬 작가는 ‘중국 이민 청소년’이라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소재를 사실적인 취재에 기반하여 생동감 있게 담아 냈다. 국경을 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임에도 청소년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은 더해진 요즘, 독자는 지훈의 상황에 더욱 이입하며 연대와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교실 문을 열자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귀를 아프게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흘낏거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찰흙을 꺼냈다. 흙을 만지니 조금 진정이 됐다. 조물조물 흙을 굴려서 동그란 머리통을 만들었다.
오늘은 누굴 빚을까.
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본다. 곧 캐나다로 떠난다는 마이클, 아빠가 공안이라는 장, 미친 류웨이, 비슷비슷하게 생긴 양리와 왕웨이……. 삐뚤어진 얼굴, 무언가 숨기고 있는 얼굴, 표정 없는 얼굴들을 자세히 살폈다.
오늘은 류웨이로 하자. 나는 무릎 위에 동그란 흙덩이를 놓고 흙 속으로 조각칼을 넣었다. 칼이 흙을 파고들자, 흙 속에서 점점 표정이 드러난다. 몸속에 피가 조금씩 도는 느낌이다. 병마용의 병사들처럼 표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조각하려면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반 아이들이 제격이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전생에 내 적군이었다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어떤 아이를 다 조각하고 나면 그 아이에 대한 미움도 희미해진다.
그때였다. 형 앞으로 모래를 실은 커다란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덤프트럭은 형을 집어삼킬 듯이 달려왔다. 트럭이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멈췄다. 형의 자전거는 이미 삼켜진 뒤였다.
형이 밝은 옷을 입었으면 괜찮았을까. 아니 트럭이 흰색이었다면, 서로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내가 좀 더 빨랐다면, 그랬다면 형은 안전하게 신호등을 건넜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형이 돌아보고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더라면.
형을 끌어낼 때도, 형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그 말만 중얼거렸다.
병원은 아수라장이었다. 의사 한 명이 나한테 소리를 질렀다.
"환자랑 무슨 관계예요? 학생! 무슨 관계냐고!"
"동생, 동생이요."
"보호자한테 연락하세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