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무선은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군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아직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에 죽어서는 아니 되는 목숨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그 외의 벌은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무엄한 자를 봤나! 나라의 군사기밀이 모두 숨어있는 곳에 몰래 들어왔으면서 살기를 바라다니 이 무슨 망발이더냐? 무엇을 훔치려고 했는지 말하여라. 첩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니라.”
최영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의 야무진 입매와 살기에 가까운 의지를 빛내는 눈빛을 노려보며 엄중하게 말했다. 무기 창고에 겁도 없이 들어와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저는 첩자도 아니고, 무엇을 훔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허 저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말하느냐. 당장 이실직고하고 죗값을 받아라.”
그를 무릎 꿇렸던 나졸이 노기 띤 음성으로 무선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5년 전 군기감의 무기고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원나라에서 염초와 화약을 수입했다는 이야기를 부친께 들었습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에 겁도 없이 몰래 들어 왔지만, 결코 훔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 나졸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다시 소리쳤다.
“어허, 이놈이 누구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훔치려 하지 않았다니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최영은 나졸을 저지하며 무선에게 물었다.
“군기감에서 일한 자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수치스럽지도 않은가?”
무선은 날마다 대장간에 올 구실을 만들었다. 어떤 날은 하인들이 쓰는 호미와 작두의 날을 갈아야 한다고 덕새에게 성화를 부렸고, 그것도 없으면 어머니에게 부서진 문고리나 경첩은 없는지 물었다.
다음날에도 대장간에는 시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편자가 놓여있었다. 대장장이는 말발굽의 편자를 두들기고 있었다.
“저 편자들은 어디서 오나요?”
무선이 묻자, 늙은 대장장이는 걱정스럽게 한숨부터 쉬었다.
“오랑캐와 왜구들 때문에 나라가 조용할 틈이 없으니, 병영에서도 손이 모자라 여기까지 오게 되는 겁니다.”
“일거리가 많은데, 왜 한숨을 쉽니까?”
무선이 묻자 노인은 손을 멈추고 어둠 한쪽을 응시했다.
“저의 자식놈도 전쟁에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살아있는 거겠지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무선은 슬픈 소식처럼 마음이 먹먹해졌다. 무선은 다음 날에도 두레박 고정쇠가 부서진 것을 들고 다시 대장간으로 찾아갔다.
얼마 전 무선은 옥란을 위해 우물 위에 활차(도르래)를 설치해 주었다. 옥란이 우물을 긷다가 두레박을 가끔 빠트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꺼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덕새를 부르고, 갈고리를 찾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무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구해오신 책 중에는 원나라에서 건너온 그림책도 있었다.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들과 그 만드는 방법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그 내용 중에 활차라는 것이 있는데, 그 끝에 두레박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그 활차만 있으면 두레박을 우물에 빠트리지 않고도 물을 길을 수 있었다. 무선은 덕새의 도움을 받아 활차를 만들어 보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완성했다. 솜씨는 서툴러 모양새는 엉성했으나, 활차에 매달린 두레박은 우물에 빠지지 않았다.
두레박을 둘러싼 쇠 테두리와 두레박을 연결하는 고리는 녹이 슬고, 때로는 닳아 고리에서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선은 신이 난 듯 대장간을 찾았다.
다음날도 무선은 묵묵히 좌식 책상을 앞에 두고 가져온 흙들의 냄새를 맡고 흙을 채취한 날짜와 장소를 기록했다. 가끔 눈을 꿈쩍이며 먼 데를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금주의 마음은 조금씩 타들어 갔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몸을 혹사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서방님, 흙에만 고개를 처박고 계시니 눈이 나빠지실 것 같습니다. 좀 쉬었다가 하시지요.”
무선의 구부정한 어깨와 움푹 들어간 얼굴에 광기가 어릴 만큼 몰두하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났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님을 알기에 더 그랬다.
“잠시라도 고개를 들면 머릿속이 모두 흐트러지고 말 것이오. 어제 받쳐놓은 것과 오늘 새로 끓이고 걸러 받친 것이 어떻게 다른지 기록 중인데 그것이 잘 못 되면, 어제부터 했던 일이 말짱 헛것이 되오. 아니지, 그동안의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하오. 당신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걸 완성해야 하는데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오. 사람들 소문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방님 말이 옳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마음 두지 마시고, 건강을 돌보셔야지요.”
무선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며 묵묵히 지난 기록을 다시 되짚어 보며 말했다.
“그래, 미쳤다고 하라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함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소. 내 간절함이 크기에 누구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런 것으로 마음 흔들리지 않으니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무선은 마당을 내다보았다. 덕새는 한 손에 지게 지팡이를 쥔 채 건너 채 마루 끝에서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지게를 해 와서 광에 쌓아놓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아마도 덕새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옥란에게 가 있을 것이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인지 늘 앙상한 감나무의 길게 뻗은 빈 가지에만 눈이 가 있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민주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탱고」 당선.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신의 자장가」 당선. 김만중 문학상(은상) 수상. 천강문학상 수상.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및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졸업. 소설집 『화이트 밸런스』, 공동소설집 『쓰다 참, 사랑』, 장편소설 『최무선: 하늘을 나는 불』 출간
목차
머리말
1부
1. 한밤의 월담
2. 불의 힘
3. 달고 시고 맵고 짠
4. 새로운 발견
5. 만백성의 염원
6. 벽란도의 푸른 희망
7. 내우외환
8. 무경총요
9. 희생
10. 수적천석
2부
11. 자작나무의 인내
12. 꿈의 포성
13. 함포의 탄생
14. 기적의 진포
15. 구국의 운명
16. 화포법과 화포섬적도
에필로그. 화력 조선의 뿌리 신기전
최무선 해설 – 민족적 자부심으로 거듭난 국난 극복의 역사
최무선 연보
최무선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